“일정이 몰린 주말에는 새벽 1시에나 집에 들어갈 정도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요.” 새누리당 이상일 의원은 요새 연말 송년회에 빠질 핑곗거리를 잃어버렸다. 당협위원장을 맡은 지역의 송년회나 동문회부터 굵직굵직한 지자체 행사까지 참석하느라 당 대변인 시절보다 바쁜 나날을 보낸다. 이 의원은 29일 통화에서 “국회에 온 뒤로 매번 국회 본회의장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는데 예산안을 일찍 처리한 덕분에 지역에서 낯이 서는 것 같다”며 “몸은 힘들지만 직접 지역민을 만나고 예산실적도 홍보할 수 있어 마음은 즐겁다”고 말했다.
여야 의원이 모처럼 연말에 지역구를 챙길 수 있게 된 것은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다. 예산안 자동부의 조항이 처음으로 적용되면서 지난 2일 새해 예산안 숙제를 해치웠다.
지난해만 해도 정부 예산안이 연말 벼락치기 심사 끝에 2년 연속 해를 넘겨 올해 1월1일 새벽에 통과됐다. 2012년에도 12월31일 밤이 돼서야 가까스로 본회의에서 예산안이 가결됐다. 예산안 늑장처리가 관례처럼 되면서 지난해에는 의원 대부분이 지역구 행사의 축사나 인사말을 직접 촬영해 보내야 했다. 일부 의원실은 동영상을 위해 광고회사 관계자를 섭외했을 정도다.
올해에는 여유가 생긴 의원들이 너도나도 지역구에 매달리고 있다. “예산 따내느라 바쁘다”는 구실을 더 이상 댈 수 없어서다. 정치권 혁신경쟁의 일환으로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이 검토되면서 지역구 쟁탈전이 치열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10월 헌법재판소가 선거구 인구 상·하한선 비율(3대 1)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016년 20대 총선에 대대적인 선거구 재획정이 불가피해진 상황도 맞물렸다.
2015년도 예산안이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올해엔 예산안이 일찌감치 통과되면서 여야 의원이 지역구 행사, 토론회, 해외 출장 등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어느 때보다 바쁜 연말을 보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의원들의 잦은 해외 출장도 예년 연말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예산안 처리 이후 연초에 집중됐던 의원들의 ‘출장러시’가 이번엔 연말로 당겨진 것이다.
세계일보가 이날 국회사무처 국제국으로부터 ‘의원 해외출장 현황’을 확인한 결과 이달 들어 벌써 6팀이 외국을 다녀왔고 1팀은 출장을 계획 중이다.
의원친선협회 차원에서 새누리당 정문헌, 박성호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신기남 의원이 지난 10일 7박8일 일정으로 이탈리아를, 새누리당 윤명희, 새정치연합 김우남 의원은 지난 15일 4박5일 일정으로 모로코를 방문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의원 5명도 19일부터 26일까지 이탈리아 등에서 ‘한-이탈리아 수교 130주년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정의화 국회의장(17∼24일)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18∼21일)도 각각 중국 출장을 마쳤다. 30일에는 한중의회정기교류체제 간사인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 등 4명이 중국으로 출국한다. 당초 연말에 출장을 가려던 예산결산특위는 내달 하순 이후로 연기했다.
올해 해외 방문은 대부분 12월 임시국회 일정과 겹쳐 있어 외유성 출장이란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이옥남 정치실장은 “출장 사유가 명확하지 않고 단순히 시찰이나 격려의 목적으로 해외를 방문하는 것은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며 “국회윤리기구를 통한 방문외교 사전심사제 도입 등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바쁘던 여의도, 올해는 ‘텅텅’
의원들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국회는 여유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늘어난 연말 모임 탓에 임시국회 회기 중임에도 의원들의 여의도 출석률은 저조한 편이다. 평소 주요 당직자와 중진 의원이 20여명 가까이 참석하는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의 참석자는 전날 고작 8명에 불과했다. 김무성 대표까지 회의에 불참했다.
세월호 참사에 따른 각종 후속법안 준비에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까지 거치며 격무에 시달렸던 보좌진도 그간 쌓였던 휴가를 한꺼번에 쓰면서 달콤한 연말을 보내고 있다. 의원실 관계자는 “의원실마다 두어 명은 휴가를 떠나 자리에 없고 남은 사람도 일이 많지 않아 오후 6시면 퇴근해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고 전했다. 국회를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들도 때아닌 휴가철을 맞았다.
연말이면 정기국회 입법과 새해 예산안 지원업무로 야근을 밥 먹듯이 했던 국회사무처 직원들도 덩달아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이들은 30일 19대 국회 들어 처음으로 송년회를 치른다.
국회 관계자는 “박희태 국회의장 시절이었던 2010년 송년회를 한 뒤로는 늘 신년회만 했는데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세준·김건호 기자 3j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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