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지난 10일 1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의정부 화재 현장에는 이승선(51)씨도 있었다. 그는 화재가 난 도시형생활주택 거주민이 아니었지만 출근길 우연히 화재를 목격한 뒤 현장에 뛰어들어가 동아줄로 10명의 생명을 구했다. 그의 살신성인 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고, 한 독지가는 3000만원의 성금을 전달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씨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거절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민으로서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을 도왔는데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다”며 “그런 위기가 닥치면 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의인' 이승선 씨의 구조 장면 경기도북부소방재난본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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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해져서”, “귀찮아질까봐”…침묵하는 사람들
대학생 윤모(25)씨는 얼마 전 교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게시글을 보고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해당 글에는 ‘길에서 성추행이나 강도를 당하는 사람을 봤을 때 도와줬다간 큰일 날 수 있으니 도와주면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댓글들 역시 ‘괜히 말려들어 피해를 입으면 나만 손해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현명하다’ 등 글쓴이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윤씨는 “나 역시 위험한 상황에 직면한다면 선뜻 나서기 어려울 것 같지만, 이렇게 ‘무조건 도와주면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진 것을 보니 안타까웠다”며 “나 혹은 내 가족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도 아무도 안 도와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기피인식은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세계일보 취재팀이 오픈서베이에 의뢰해 전국 25∼60세 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담배 피우는 청소년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발견했을 때 못 본 척 넘어간 적이 있는가’란 질문에 85.3%(597명)가 ‘그렇다’고 답했다. 10명 중 8명 이상이 불의나 타인의 위험에 침묵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냥 넘어갔던 이유로는 ‘개입했다가 위험에 빠질까봐’란 응답이 43.0%(257명)로 가장 높았고, ‘개입했다가 경찰 조사 등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란 응답은 23.3%(139명)였다. 반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란 응답은 7.9%(47명), ‘내가 안 나서도 다른 사람이 나설 것 같아서’란 응답은 4.4%(26명)에 불과했다. 타인의 위험이나 불의를 목격했을 때, 자신과 아예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이들이 도와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자신이 위험에 빠질까봐 모르는 척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길에서 싸움이 나는 등 개입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말리기보다는 그저 구경하면서 동영상만 찍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에서는 ‘길거리 싸움 동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영상 속 시민들은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휴대전화를 들고 촬영을 하거나 부추기는 모습이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신고라도 해주면 다행인데 신고할 생각조차 안 하는 사람이 많다”며 “사건 조사를 위해 목격자들에게 진술을 요청했을 때 ‘상관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모(27)씨는 지난해 난감한 일을 당했다. 한 남성이 지적장애 여성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저지하다 폭행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됐다. 주변에는 많은 목격자가 있었지만 경찰에 나서서 진술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씨는 “피해 여성이 명확하게 진술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목격자가 필요했지만 다들 처음에는 나 몰라라 했다”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어도 개입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침묵’에는 실제 사례들이 영향을 미친 면도 많다. 청소년에게 훈계를 하거나 타인의 사건에 개입했다가 피해를 당한 사례들이 잇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의인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분위기도 한몫한다. 세월호 사고 당시 안산 단원고 학생 등 20여명을 구한 화물차 운전기사 김동수(49)씨는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호소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생계마저 막막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올 것이 두려워 타인의 위험을 못 본 척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자신이 피해의 당사자가 됐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의인에 대한 합리적 보상이 보장되고, 공동체 의식이 회복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일종의 학습효과다. 선의의 손길을 뻗쳤을 때 돌아오는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를 많이 접하다 보니 ‘참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란 인식이 생긴 것”이라며 “의인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 체계가 전제되고, 그들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중백 경희대 교수(사회학)는 “타인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란 생각에 시간이나 노력을 들여 개입하려는 의지가 줄어든 것”이라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궁극적으로 공동체 의식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유나·권구성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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