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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 평전 ‘누르하치’ 통해 본 조선의 무능

입력 : 2015-02-05 20:42:12 수정 : 2015-02-06 00: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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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의리’만 찾다 정세오판
정묘호란·병자호란 비극 초래
1592년 2월 여진의 누르하치는 “조선에 대해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고 요구를 받자 머리를 한껏 조아린다.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조선과 우호를 위한 동맹을 맺고 싶다.” 당시 조선은 여진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상대였다.

1621년 9월, 조선 정부는 여진의 사신을 달래 침입을 막을 방법을 의논하고 있었다. 신하들의 논의가 답답했던지 광해군은 “이 적들의 세력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병력으로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광해군의 말에서 조선과 여진의 역학 관계가 역전되었음이 드러난다. 

누르하치의 여진이 동북아의 강자로 급부상할 때 조선은 대명의리에 매달리며 국제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고, 결국 병자호란을 초래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겪었던 조선의 치욕을 증언하는 유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 조선과 여진의 관계 변화는 극적이다. 조선과의 갈등을 극도로 꺼렸던 여진은 30년이 지나고 조선이 감당하기 힘든 세력으로 성장했다. 다시 20년이 지나자 최강국 명나라까지 숨통을 죄고 있었다. 누르하치란 걸출한 인물을 만난 여진은 당시 동북아시아를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책 ‘누르하치’(천제셴 지음, 홍순도 옮김, 돌베개·사진)는 여진을 이끌었던 누르하치 평전이다. 그는 요동 지역 곳곳에 흩어져 부족 단위로 살아가던 여진을 규합하고 마침내 청 태조로 등극한 인물. 드라마틱한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크지만 눈길을 끄는 건 조선과 여진의 관계 변화다. ‘대명의리’에 집착해 세계 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당시 조선의 무능은 미국,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지금의 한국에 반면교사가 된다.

여진에게 조선과 명은 ‘슈퍼 갑’이었다. 각 부족의 수령은 조선, 명의 벼슬을 구했고, 양국과의 교역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처지였다. 때로 변방을 약탈하기도 했지만 응징을 두려워해야 했다. 1592년 누르하치의 말에서 이런 관계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분열된 여진 부족을 규합해 갔고, 그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 명, 일본이 얽혀 7년간 이어진 ‘대전’(大戰)을 틈타 누르하치는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팔기제는 누르하치가 이끈 여진의 성장을 뒷받침한 군사·행정 제도였다. 각 단위를 상징하는 깃발로 구분지어졌고, 청나라의 정예군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돌베개 제공
전세의 역전이 확실해진 것은 1600년대였다. 국가 규모와 체제를 갖추면서 누르하치는 ‘국왕’을 자처했고, 1616년 나라를 ‘금’으로 칭했다. 1618년에는 명나라 정벌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명나라와 처음 치른 무순 전투에서는 큰 승리를 거뒀다. 무순 전투 직후 눈에 띄는 점은 여진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던 조선의 오판이다. 무순 전투의 전리품을 분배하고 휴식을 갖기 위해 4개월 정도 공격을 멈춘 것을 두고 “누르하치가 확실히 죄를 뉘우치고 자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1619년 ‘살이호산 대전’(사르후 전투)에서 광해군은 중립외교 정책을 펼치며 정세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명의 원군 요구에 응해 파병한 강홍립 부대를 누르하치 군대에 투항하게 한 것.

하지만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조선은 그를 여전히 ‘여진족의 수령’쯤으로 여겼고, 명나라에 등을 돌리고 후금과 동맹을 맺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의 숨줄을 끊어놓기 위해 배후를 안정시키고 싶었던 누르하치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우호 관계를 형성하기를 오랫동안 희망했지만”,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여기는” 고집을 결코 꺾지 않았다. 투항한 강홍립 부대의 병사 수백명을 죽이며 압박했지만 조선은 요지부동이었다. “누르하치가 조선을 몹시 미워한 데에는 이런 원천적인 이유”가 있었다. 결국 조선 본토에 대한 정벌 주장이 대두됐다. 명나라와의 전쟁이 더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누르하치의 조선 정벌은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뒤를 이은 황태극은 즉위하자마자 조선 출병을 단행했다. 인조가 황태극의 면전에서 항복의 의미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청나라 시대 황제를 만났을 때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행하던 예법)를 하는 것으로 끝난 병자호란의 치욕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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