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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히로시마 원폭, 명성황후의 해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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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3-01 22:08:06 수정 : 2015-03-01 2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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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3·1절이었다.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만세 부르던 파고다 공원도 유관순 열사도 아니고 엉뚱하게도 히로시마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의 하늘에는 섬광과 함께 죽음의 버섯구름이 18㎞ 상공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왜 인류 최초의 핵공격 지점이 하필 히로시마였을까.

히로시마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침략의 전진기지였으며, 1894년에는 대본영이 설치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병력을 보낸 곳이다. 이런 역사를 가진 히로시마가 희생물이 된 것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이끈 군사령부가 위치했기 때문이라거나, 이전까지 한 번도 공습을 받은 적이 없는 도시였기에 공포심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란 분석을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탐험하는 필자의 눈에는 히로시마의 선택은 우연이 아니었다.

차길진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의 옥호루에 20여 명의 일본 낭인이 난입해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살해한다. 시해된 명성황후는 믿기 어려운 능욕을 당하고, 그 시신은 향정원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일본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분수령으로 조선을 장악하고 대륙 진출의 발판을 다졌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명성황후의 저주는 서서히 나타났다.

일본 낭인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에 앞장선 조선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 히로시마 인근의 구레시에서 고영근에게 살해되는가 하면 진짜 주범으로 당시 일본을 이끌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을미사변 14년 후 1909년 대한의 육군중장 안중근에게 사살당했다. 안 장군은 재판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나열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였다.

해방까지 우리가 벌인 독립운동과 극일운동의 시발점이 을미사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으로 몰아가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를 비판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전 세계적으로 들끓자 일본 정부는 시해범으로 지목된 48명의 용의자를 전부 소환해 히로시마 재판소에 넘겼다. 하지만 용의자 전원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했고, 이들은 오히려 구국의 영웅으로 박수갈채를 받으며 출세의 길을 내달렸다.

그 후 동아시아를 장악한 일제는 1941년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세계를 제패할 듯 보였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으로 일본 국민은 더없는 굴욕과 공포, 그리고 나라의 패망을 안고 말았다. 히로시마는 명성황후 시해범을 무죄로 방면한 바로 그곳이다. 을미사변 이후 50년 되는 해에 히로시마가 원폭을 맞은 것이 명성황후의 해원(解寃)이라면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었을까.

최근 일본은 파렴치한 역사왜곡을 자행하며 주변국을 자극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위안부, 독도 문제에 트집을 잡고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비틀어진 일본의 행태에 일침을 놓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역사의 죄목은 무엇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대한민국은 이 만행에 대해 그 어떤 역사적 사안보다도 먼저 일본에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 120년이 지나 새로운 을미년을 맞이한 즈음 일본 역시 미래의 번영을 바란다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부터 진심으로 사죄해 냉혹한 인과의 짐을 덜고 가야 한다.

차길진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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