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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뒤에 숨은 日을 고발하다

입력 : 2015-03-12 21:08:10 수정 : 2015-03-12 21: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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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익사’ 국내 출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80) 장편소설 ‘익사’(문학동네)가 박유하 번역으로 국내에 출간됐다. 노작가의 만년 작품답게 성찰하는 시적인 톤으로 교향악처럼 전개되지만, 곳곳에 무거운 문제의식을 내장하고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는 작품이다. 이 장편의 화두는 국제적인 문학상 수상을 기려 작가의 고향 시코쿠에 세워진 기념비의 시구에 담겨 있다.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도 하지 않고/ 강물결처럼 돌아오질 않네/ 비 내리지 않는 계절의 도쿄에서,/ 노년기에서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네.”

‘코기’는 주인공 조코 코기토라는 작가의 유년기 별칭이다. 앞 두 행은 작가의 모친이, 나머지 세 행은 작가가 이어 완성했다. 모친이 던진 앞부분은 일본이 패전할 때 홍수로 불어난 강물로 보트를 타고 내려가다 익사한 코기의 아버지를 탄하는 내용이고, 뒷부분은 말 그대로 이제 말년에 이른 작가가 꿈처럼 희미한 아버지의 익사 장면을 오래 기억 속에 묻어두었다가 다시 꺼내는 맥락이다.

소설은 어머니가 죽으면서 딸에게 맡겨두었던 ‘붉은 가죽 트렁크’를 작가가 여동생으로부터 전달받으면서 쓰려고 마음 먹은 ‘익사 소설’로 시작된다. 작가의 아버지는 패전 무렵 산속 집에서 장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궐기’를 도모하다 먼저 실행에 옮기기 위해 떠났다가 익사한 인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구체적인 자료를 어머니에게 요구했지만 그네는 끝까지 거부했고 모친 사후 10년에서야 작가의 품에 가방이 들어왔다. 정작 그 가방 안에는 소설에 활용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들은 없고 엉뚱하게도 영국 인류학자 J.G.프레이저(1854∼1941)의 명저 ‘황금가지’ 3권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정치적 스승이 밑줄을 그어 빌려준 책인데 그 밑줄 내용이 심상치 않다. 왕이 어떻게 살해당하고 세계의 힘이 다시 시작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서술이 그것이다. 코기의 아버지와 장교들은 쇠약해진 ‘인간신(神)’을 처단하고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궐기’를 감행하려 한 것인데, 장교들은 단지 ‘농담’일 뿐이라고 후일 둘러댔지만 아버지는 그 농담을 실천에 옮기려다 죽은 셈이다.

고향 마을 ‘산속 집’으로 내려가 극단 ‘혈거인’의 구성원들과 작품을 연극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뼈대다. 작가와 더불어 중요한 인물로 젊은 여성 단원 우나이코가 등장한다. 이 여인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할 만큼 강력힌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말미에 드러나는 개인사가 한국 독자들에게는 특히 소구력을 발휘할 만하다. 실제 오에 겐자부로의 지적장애 아들인 히카리도 실명으로 등장해 아버지와 갈등하면서 익사한 작가의 아버지까지 한 줄로 묶인다. 이 소설을 마지막으로 완성하는 의외의 인물은 패전 이전 점령지에서 고아가 되어 귀환해 그 처지를 딱하게 여긴 작가의 어머니가 ‘기시기시’라고 이름을 지어준 인물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면 도스토예프스키 ‘악령’의 한 캐릭터가 살아난 듯한 전율을 안긴다.

일본의 대표적인 양심적 지식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 그는 만년의 소설 ‘익사’에서 깊은 성찰과 풍부한 인문적 교양을 바탕으로 일본의 시대정신을 비판적으로 녹여냈다.
우나이코는 작가의 고향 시코쿠에 내려오는 메이지 시대 어머니들의 봉기를 연극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작가와 공유하면서 17세 때 큰아버지가 자신을 강간한 사실을 털어놓고 연극에 삽입하려 한다. 피 묻은 팬티를 큰어머니에게 보여주었더니 그네는 “이 나라 가장 엄숙한 곳에서 심신을 깨끗이 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해보자”면서 야스쿠니 신사로 데려갔다. 이곳에서 우나이코는 얼굴 바로 앞에서 펄럭이는 일장기를 보다가 현기증이 나 토하면서 임신 사실을 알았고, 낙태를 강요당했다. 큰아버지는 일본 교육계의 실력자로 큰 훈장까지 받은 고위관료로 승승장구하다 은퇴했는데, 어디선가 정보를 입수하고 우나이코를 납치한다. 감금된 우나이코에게 큰아버지가 하는 말. “우리는 ‘둘이서 동시에 하는 자위행위’를 합의 하에 즐겼어.” 우나이코의 입을 빌려 오에 겐자부로는 큰아버지의 행위를 ‘국가의 강간’이라고 규정한다.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인하기 혹은 합리화 행각이 오버랩되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오에 겐자부로는 일왕이 문화훈장을 주려고 했지만 “나는 민주주의 그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그는 일관되게 천황제를 반대해왔으며 평화헌법 9조 지키기 운동에도 매진해왔다. 이 소설에서 풍부한 인문적 교양과 만년의 깊은 성찰을 배경으로 일관된 신념을 설화적으로 녹여내는 거장의 무르녹은 솜씨를 만끽할 수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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