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각에서는 탈스펙이 또 다른 ‘줄세우기’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학벌 중심 문화를 타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의견이 많다. 이번 기회에 국내 채용 문화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27일 재계에 따르면 올해 SK, LG, 현대차, 포스코 등 많은 기업들이 탈스펙 채용을 추진하거나 적용하고 있다. 학점이나 어학능력 등 기존에 취업을 위한 ‘기본’이라고 여겨졌던 스펙이 아닌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직무능력을 위주로 사원을 채용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름이나 전공 등 기본적인 정보를 제외하고는 면접관에게 지원자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블라인드 면접’ 형식을 채택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아예 지원할 때부터 최소한의 정보만 내도록 하는 곳도 많다.
SK그룹은 올해부터 대졸 신입사원 입사지원서에서 스펙 관련 항목을 완전히 없앴다. 지원자들은 수상경력, 업무 경험, 해외경험, IT활용능력, 외국어성적 등을 지원서에 쓰지 않아도 된다. SK그룹은 자기소개서와 면접, 인턴십 등을 통해 직무수행능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한다는 계획이다.
2013년부터 사진이나 외국어능력, 석·박사 표기, 전과 및 편입 여부를 기재하는 난을 없앤 현대차는 올해에는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 내역란까지 삭제했다.
이밖에 LG그룹이 어학연수, 봉사활동 경력, 수상경력은 물론 주민등록번호나 사진, 가족관계, 주소 등 개인정보 입력란을 없애는 등 많은 기업들이 직무와 관련 없는 사항은 기재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포스코는 올해 상반기 공채부터 직무역량평가와 최종 면접을 블라인드 형식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금융권 역시 탈스펙 대열에 동참했다. 우리은행은 지난해부터 금융자격증과 외국어 성적 기입란을 없앴다. 금융자격증은 입사 이후 내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취득하게 한다는 방침이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도 입사지원서에서 어학과 금융자격증 기재란을 삭제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탈스펙 채용 트렌드가 구직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기업들이 인문학 소양이나 글쓰기 능력, 시사상식 등을 중시하면서 ‘제2의 스펙 줄세우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직무 역량 평가’가 추상적이라 준비를 하기 어렵다는 불만도 있다. 취업준비생 한모(26)씨는 “외국어능력시험이나 자격증 등 스펙을 쌓기 위해 몇년간 준비했는데 이런 것을 안 본다고 하니 허탈한 생각도 든다”며 “탈스펙 전형은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지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어서 취업이 오히려 더 어려워진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면접 특강이나 대기업 인·적성시험 대비반 등 또 다른 ‘취업 사교육 시장’이 성행하는 것도 탈스펙 채용의 그늘이다.
그러나 이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탈스펙 채용 흐름 자체는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학벌이나 해외연수 경험 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이 같은 흐름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지방대에 재학 중인 박모(25)씨는 “그동안 입사지원서를 채우기 위해 전공 상관없이 모두가 영어 성적이나 공모전, 해외 연수 등에 목을 맸던 것이 사실”이라며 “지방대라 불리하다는 생각도 많았는데 탈스펙 채용이 확대되면 적어도 ‘출발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과거에는 ‘스펙이 높으면 성실한 지원자’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직무와 상관없는 스펙들만으로는 직무 능력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많다”며 “현재는 스펙 중심 사회에서 탈스펙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라 불만이나 혼란이 나올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출신학교나 영어 성적 등과 상관없이 직무에 적합한 인재를 뽑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