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먹빛 속에 5채(彩)가 있고 화선지에 먹이 번지는 소리가 마치 누에가 뽕잎 갉아먹는 소리처럼 들려오거든 그제야 입문한 줄 알거라. 한 장의 수묵화를 보며 오채를 느끼고 먹 번지는 소리가 소나기 오는 소리처럼 고막을 칠 때 비로서 그림에 입문한 것이니라.’ 동양미학을 다룬 책들에서 접할 수 있는 ‘경구’다. 지난 50년간 한국화의 현대성을 모색해 온 원로화가 송영방(79)도 늘상 학생처럼 이 경구를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
“30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양의 두터운 미술역사 속에서 자기화시킨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죽는 날까지 학생일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노력이야말로 ‘가슴 뭉쿨한 장엄미’라 했다.
6·25전쟁 직후 제대로 된 화랑도 없는 상황에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던 시절, 잡지 외 신문에 삽화를 그려가며 학비를 벌어야 했던 고난의 시기도 그렇게 견뎌왔다.
“어린 시절 아버님이 제사 때마다 제게 지방문(紙榜文)을 쓰게 했습니다. 가운데 손가락 길이의 흐느적거리는 붓털로 강한 필선을 그려나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가 있었어요.” 그가 한국화에 빨려든 계기다.
오는 6월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그는 1961년 묵림회(墨林會) 창립에 참여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엥포르멜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기 시작했다. 바로 새로운 추상수묵의 시도다. 한국화 당대성(현대성) 모색의 출발이었다.
“저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기운 생동하는 ‘추상’을 보게 됐습니다. 한국화를 마치 옛부터 내려오는 토산품처럼 취급하는 우리 화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점과 선, 발묵으로 엥포르멜마저 포섭해 버린 꼴이다.
송영방 화백이 자신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서 지나온 화업을 들려주고 있다.그는 “작품세계를 ‘자기화’하고 득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길은 멀리 돌아가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
“동양미와 서양미는 기차의 두 레일처럼 같이 뻗어가는 것이란 인식이 필요합니다. 바다 건너서 온 남의 것이 더 아름답다고 기웃거리는 이 시점에 우리 것이 아름답다는 긍지가 절실합니다.”
그는 전시장에 내건 족자그림이 우굴쭈굴 구겨져 있는 것을 가리키며 한국화의 자화상이라 했다. 표구 기술마저 단절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화가 현대적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라 했다.
“책을 펼쳐 놓은 듯한 한국병풍은 이동식 벽화와 다름없어 모던한 공간일수록 더 잘 어울립니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한복을 입으면 더 돋보이듯이요.”
그는 요즘 매화그림에 흠뻑 빠져 있다. 성북동 자택 정원에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며 생태를 꼼꼼히 살폈다. 전시장에도 매화그림 병풍이 나와 있다.
“매화의 가지를 보면 뿌리의 깊이와 굵기를 알 수 있습니다. 잔가지들의 얽히고설킨 공간미가 매력 포인트죠. 힘있는 등걸과 대비돼 긴장미를 유발합니다. 보드라운 꽃은 이를 배가시켜 주지요. 붓놀림에서 이를 모두 담아내야 하기에 매화그림은 누구든 어려워합니다.”
실제로 매화시를 많이 남긴 추사조차도 매화 그림을 남기지 못했다. 그리기는 어렵지만, 조형적으로 그 특징을 잡아내 표현할 수 있어 작가들에겐 늘상 도전의 대상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최소한 4군자 중에 하나 정도는 제대로 섭렵해 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런 노력들이 이 시대의 감성과 스파크를 일으키면 새로운 창조가 저절로 이뤄지게 됩니다.”
그는 이런 과정적 시련을 감내하는 자세야말로 독특한 ‘자기화’의 밑거름이라 했다. 힘들다고 운필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려는 세태에 대한 일침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