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으로 아픔을 겪은 학생들이 ‘해맑음센터’에서 자활 프로그램을 이수하며 학교생활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해맑음센터 제공 |
자정이 가까운 시각, 책상 위 부르르 떨리는 휴대전화를 확인한 고등학생 2학년 A(17)군은 한숨을 푹 쉬었다. 메시지 주인공은 지난해 이어 같은 반이 된 B(17)군. B군은 지난해부터 자신의 생일이라면서 돈을 요구하거나 바지 수선비조로 3만원을 받아내는 등 A군에게서 상습적으로 돈을 갈취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욕설과 폭행으로 보복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서 B군과 같은 반이 된 사실을 알고 A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A군이 엄마 지갑에서 조금씩 빼내 건넨 금액만 20만원 가깝게 됐다. 요즘엔 다가오는 수학여행 문제로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B군에게 시달릴 일도 걱정이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다른 친구들도 자신을 따돌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10대들이 학교폭력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폭행과 금품갈취에 사이버 괴롭힘까지, 설레야 할 새 학기를 악몽으로 느끼는 청춘들이다.
‘눈 찝은 년’ ‘눈 째뿔라’
지난 3월 초등학생 C(12)양은 무심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평소 친하다고 여겼던 학급 친구 4명이 SNS인 ‘카카오 스토리’에서 C양의 눈을 소재로 욕설 섞인 댓글을 쓴 걸 봤기 때문이다. 화가 난 C양은 해당 친구들에게 평소 속상했던 점을 적어 카카오 스토리에 올렸다. 그렇게 올린 글은 더 큰 화를 불렀다.
친구 중 하나인 D(12)양은 해당 글을 캡처해 올린 뒤 ‘필독’(게시글을 특정인이 꼭 보게 하는 것) 기능을 써 친한 친구들에게 퍼뜨렸다. 이후 모르는 사람을 포함한 20여명이 카카오톡, 페이스북, 전화, 문자 등으로 연달아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현재 C양은 가입했던 모든 SNS를 탈퇴한 상태다. 그는 “스마트폰 메시지 알람음만 들어도 너무 무서워서 몸이 떨린다”고 했다.
교육부가 실시한 2014년도 2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피해유형 중 사이버 괴롭힘은 언어폭력(35.4%), 집단따돌림(16.8%), 폭력(11.8%), 스토킹(10.1%)에 이어 9.9%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이버 괴롭힘은 기존 폭력 유형과 달리 시공간 제약이 없어 하루 24시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 기술 적응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교사, 학부모 등이 해당 유형의 피해를 인지하기가 쉽지 않기도 하다. 오인수 이화여대 교수(교육학과)는 “언어폭력이나 집단따돌림보다는 비중이 작지만 사이버 괴롭힘은 다양한 폭력 유형과 결합돼 나타난다”며 “범죄 수준에 이르는 폭력이 사이버 괴롭힘을 통해 이뤄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실시하는 학교폭력 실태 통계만 놓고 보면, 학교폭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고 있다. 교육부가 매년 두 차례 실시하는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2.2%(2013년 1차)에서 1.2%(2014년 2차)로 피해 응답률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하지만 지난 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내놓은 ‘아동의 학교생활: 학교생활 만족도, 비행 및 폭력 경험 실태를 중심으로’ 보고서는 교육부 조사와는 상반된 실태를 보여줬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9∼17세 아동 3명 중 1명이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5명 중 1명은 가해 경험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전진아 보사연 부연구위원은 “30% 이상 아동이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만큼 예방 및 치료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피해 학생이 보복의 두려움 없이 부모, 교사, 경찰 등에 즉각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교폭력으로 아픔을 겪은 학생들이 ‘해맑음센터’에서 자활 프로그램을 이수하며 학교생활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해맑음센터 제공 |
보다 근본적인 학교폭력 해결책은 학생 전체가 학교폭력 문제에 공감할 수 있는 교육이다. 학교폭력 예방 관련 단체인 ‘푸른나무 청예단’의 차민희 학교폭력SOS지원단 통합지원팀장은 “친구의 고통, 고민 등을 공감하게 되면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학교폭력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며 “또래 상담, 역할극 등 학생 간 소통할 수 있는 교육과정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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