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 할수록 조선사 부채비율도 함께 상승
지난해 5월 검찰은 회삿돈 557억원을 횡령하고 계열사 자금 2841억원을 개인회사에 부당지원한 혐의(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로, 강덕수 전(前) STX그룹 회장을 구속기소했다.
그는 또 2조3264억원에 달하는 분식회계를 통해 9000억원의 사기대출을 받고 1조7500억원어치 회사채를 발행한 의혹(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등)도 사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판사 김종호)는 같은 해 10월30일 강 전 회장에게 “자본시장의 신뢰와 투명성을 저해하는 회계분식으로 금융기관에 큰 피해를 입혔다”며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다만 1심 재판부는 2조3264억원 분식회계 혐의 가운데 4분의 1 수준인 5841억원 상당만을 유죄로 인정했다. 횡령·배임액도 679억5000만원만 유죄로 판단하고, 그 4배가 넘는 2743억원가량에 대해서는 무죄라고 판시했다.
1심 법원 판결문에서 보듯 회계 분식행위는 엄벌이 불가피한 중대범죄다. 재판부는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했지만, 검찰 구형량은 이보다 훨씬 높은 징역 10년이다. 현재 강 전 회장은 구치소에 수감 중인 상태로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이달 중 유죄 관련 심리 이후 항소심 결과는 이르면 다음 달 나올 전망이다.
여기서 당초 검찰이 강 전 회장에게 제기했던 분식회계 및 횡령·배임 전체 규모에 대한 법원의 인용금액이 대폭 줄어들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검찰 측 주장이 대부분 배척된 이유가 뭘까.
업계 안팎에서는 강 전 회장의 40여년 조선인생을 발목 잡은 분식회계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헤비 테일’(Heavy tail)로 특징되는 조선업종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분식회계 액수가 상당부분 부풀려졌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지난해 STX유럽이 건조한 세계 최대의 크루즈 여객선 ‘오아시스 오브 더 시즈’호. 오아시스 오브 더 시즈호는 타이타닉 유람선의 5배 규모로 9400여명을 탑승시킬 수 있다. 이 크루즈선 가격은 1조8200억원. 축구장 3개 반을 이어붙인 길이이며 높이는 빌딩 16층에 해당한다. ‘노아의 방주’를 닮은 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세계일보 DB |
분식회계(粉飾會計)란 기업이 재정 상태나 경영 실적을 실제보다 좋게 보이게 할 목적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자산이나 이익을 부풀려 계산하는 회계를 말한다. 분식결산(粉飾決算)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상법 등 관련 법규를 통해 이를 금지하고 있다.
조선업종 회계는 생산제품이 출고되면 1개당 판매가격에 팔린 물건 수량을 곱해 매출로 잡고, 팔리지 않고 남은 물품의 규모만큼을 재고로 처리하는 일반 제조업 회계와 다른 점이 많다.
원인은 이른바 ‘헤비 테일’ 때문이다. 꼬리 쪽으로 갈수록 두꺼워진다는 뜻으로, 건조기간이 뒤로 갈수록 건조대금이 이전 계약단계보다 더 많이 들어오는 조선업종의 거래 특이성을 감안한 용어다.
선박건조과정은 ‘계약→스틸 커팅(Steel Cutting)→탑재→진수→인도’의 5단계로 분류되는데, ‘헤비 테일’은 건조의 마지막 단계인 인도 시에 수주대금의 50~60%가 지급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헤비 테일’ 현상은 더욱 심화돼 계약과 설계 단계에서는 5~10% 정도의 계약금만 지불하고 최종 인도 시 무려 70~80% 넘는 잔금을 한꺼번에 치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문제는 이 같은 ‘헤비 테일’로 인해 조선회사가 수주를 하면 할수록 부채비율도 동시에 상승한다는 점이다.
수주금액의 절반도 안 되는 턱없이 부족한 돈으로 배를 만들어야 하므로, 완성한 배를 선주에게 넘길 때까지는 조선사가 선박 제조비용을 스스로 조달해야 한다. 이 비용을 선사는 금융권 대출과 회사채 등으로 자체 충당하는 데 전부 회계상 부채로 계상된다.
조선사 입장에서는 향후 기대수익을 위한 투자가 전액 부채로 잡히면서 수주실적이 좋음에도 부채비율이 급등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외부 평가기관으로부터는 부실기업이란 오해를 받아 신용등급이 하락하고 금융조달비용이 올라 그만큼 부담을 안게 된다는 말 못할 고충이 있다.
조선업계 고위관계자는 “헤비 테일이란 선박대금의 결제방식이 조선업의 재무구조를 망가뜨렸다”며 “조선사는 선수금 감소와 건조기간 발생하는 매출채권 증가에 직면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조선사의 경우 좋은 이슈를 나쁜 항목으로 포장하는 등 회사사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회계방식에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부채로 인식되는 선박건조비용을 투자로 보이게 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조선업종 회계의 특수성을 무시한 획일적 잣대를 들이대 규정상 분식회계라며 엄격히 처벌하면 가뜩이나 장기불황으로 곤경에 빠진 조선업에 ‘보신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때 세계 최고 회전율을 자랑했던 STX조선해양 진해조선소 도크. 사진=세계일보 DB |
검찰이 현행법에 맞지 않은 회계처리를 전부 분식회계로 밀어붙이고 애매한 자금용처는 배임으로 몰아세우면서 무리하게 수사를 했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시된다.
한 회계전문가는 “강 전 회장에게 적용된 2조3000억원대 분식회계는 2009년 이후 STX조선해양이 수주한 실적 중에서 선사로부터 앞으로 받아낼 잔금이 그 정도 남아있다고 해석하면 될 것”이라며 “검찰의 분식회계 규모 산정이 조선업의 특별한 사정을 배려하지 않고 획일적인 잣대로 이뤄졌다”고 꼬집었다.
STX 사태를 다루는 금융당국과 채권은행의 태도에도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금융당국은 그동안 ‘기업을 살리는 구조조정’을 줄곧 강조해왔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누구나 재기할 수 있는 기업 환경을 만들겠다던 정부의 약속 또한 사재를 출연하며 ‘백의종군’을 선언한 강 전 회장에게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번 STX 사태를 계기로 조선업에 대한 기업 구조조정이 ‘경제 활성화’라는 본래 취지에 맞게 작동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며 “신규자금 지원 양성화를 위해서는 회생절차기업이면 퇴출대상으로 분류하는 기존의 기업신용 위험평가 시스템이 반드시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1998년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겪으며 기업들의 영업실적이 악화되면서 분식회계가 급증했다. 특히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41조원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 재무제표를 믿고 자금을 대출해준 금융기관과 투자자, 일반국민이 엄청난 피해를 본 일이 있다. 동아건설산업 역시 이 문제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분식회계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회사는 감사를 둬야 하고, 외부 감사인인 공인회계사에게 회계감사를 받아야 한다. 분식회계를 정확하게 적발하지 못한 회계법인에 대해서는 영업정지 또는 설립인가 취소의 처분을 내릴 수 있다.
이와 함께 분식회계 처리된 재무제표를 보고 투자하는 바람에 손해를 본 투자자나 채권자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수 있다. 2007년 1월부터 분식회계에 대한 집단소송제가 제도적으로 채택된 상황이다.
금융감독원은 STX조선해양의 외부 감사를 맡은 삼정회계법인을 대상으로 회계감리를 벌이고 있다. STX그룹 계열사의 주식 및 회사채에 투자했다 막대한 손실을 입은 투자자들이 삼정을 상대로 집단소송에 나설 움직임도 관측되고 있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헤비테일 방식이 하루아침에 해소될 수는 없다”면서 “여전히 칼자루는 발주회사들이 쥐고 있으며, 발주사가 선가하락의 위험을 방어할 수 있는 헤비 테일을 포기할 유인도 없다”며, 고사 위기에 처한 조선업에 대한 정부 특단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과거에는 고금리로 자금을 조성하며 발주사 쪽에 선가 할인이 매력적으로 작용했으나,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고 있는 데다, 수익성마저 떨어져 선가 할인 여력이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영학자는 “잘 나갈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회사가 무너지면 한순간에 특경법상 가중처벌되는 경제사범으로 몰린다”며 “재기가 불가능하고 투자가 잘못되면 오너 책임으로만 추궁하는데, 어려울수록 일단 나부터 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어 “기업은 무엇을 믿고 투자를 늘릴지 불안해하고 있으며, 이게 국내기업들이 현금을 잔뜩 쌓아두고 풀지 않는 배경”이라고 덧붙였다.
박일경 기자 ik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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