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와 낭만적인 살사로 그려진
박제된 이미지와 다른 쿠바 담아
“일상의 행복 있는 매력적인 곳”
정승구 지음/아카넷/2만2000원 |
“쿠바의 젊은이들은 예전 나의 선입견과는 너무 달랐다. 내가 만난 그들은 시가를 피우지 않았고 살사바에도 가지 않았다. 간혹 살사를 즐겨 추는 친구들은 몇몇 봤지만 관광 책자에 나온 전형적인 쿠바인은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 누구도 마르크스는 고사하고 공산주의에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젊은 친구들이 쓰는 은어 중 ‘공산주의’라는 형용사는 ‘구리다’ 또는 ‘안 좋다’로 통했다.”
젊은 영화감독이자 여행가 정승구의 색다른 쿠바 여행기가 나왔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성공한 혁명으로 알려진 나라, 자유로운 음악과 살사의 낭만, 시가와 야구로 유명한 나라….’ 저자는 이처럼 박제화된 이미지와는 다른, 교과서 밖의 쿠바 모습을 전하기 위해 발로 뛰고 글로 써냈다.
작년 말 미국과 국교정상화에 합의한 쿠바는 요즘 한국인에게도 성큼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과 가장 가까운 사회주의 우방은 쿠바다. 저자는 2014년 가을 취재가 아닌 여행 비자로 쿠바를 찾았다. 연줄을 통해 인터뷰 약속을 잡고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보았던 수도 아바나를 찾았다.
맨 처음 만난 사람은 일곱살짜리 어린아이 훌리아였다. 훌리아는 숙소로 잡은 민박의 옆집 아이였다. “‘체 게바라의 사상은 우리의 마음과 머리에 살아 있으니까요.’ 학교에서 아침마다 배운 숙달된 동작이었지만 자부심을 갖고 이방인에게 체 게바라에 대해 가르쳐 주는 훌리아의 표정은 내 마음 어딘가를 흔들었다.” 사회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을 이끈 피델 카스트로의 리더십은 쿠바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남북한 공동개최를 처음 제안한 이는 피델 카스트로였다. 1986년 피델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사마란치에게 1988년 서울올림픽의 남북한 공동 개최를 제안했다. 이를 토대로 남북 간 실무자 회의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몇 차례 열렸지만 공동 개최는 물건너갔다. 쿠바는 160개국이 참여한 서울올림픽을 보이콧했다.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도 공개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던 화합의 아이디어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카스트로가 제안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젊은이들은 카스트로를 얘기할 때 두 손으로 긴 수염을 쓰다듬는 시늉을 한다. 무언극에 가까운 이 손짓은 모든 쿠바인들이 카스트로를 지칭할 때 쓰는 일종의 ‘수화’다. 그를 얘기할 때 쿠바인들은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왕조 국가의 그런 위치는 아니었다.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미국에서 건너온 자본주의의 쓰레기가 판을 치는 쿠바이지만 그래도 교육은 사회주의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쿠바 아바나 시민들이 2008년 4월30일 혁명광장에서 다음날 열릴 메이데이(노동절) 퍼레이드를 준비하며 혁명지도자인 체 게바라의 기념비 앞에서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저자는 “쿠바의 교육은 불필요한 경쟁보다는 건설적인 협력을, 타인을 다스리는 방법보다는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더불어 사는 사회와 공존하는 세상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는 “아침마다 학교에서 체 게바라처럼 되겠다고 맹세한 아이들은 커서 의사가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에볼라 퇴치를 위해 아프리카로 주저 없이 떠난다”면서 “이들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생명이나 건강과는 별 상관없는 성형외과를 운영하는 의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들”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쿠바에 대해 “내가 쿠바에서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들은 한국의 일상에서 얻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불만”이라면서 “쿠바인들은 부유한 나라에서 온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들을 보면서 미묘한 슬픔을 느꼈다. 경제적인 유복함을 얻는 것보다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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