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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한옥

입력 : 2015-07-15 10:20:00 수정 : 2015-07-15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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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답습하는 게 아니듯 한옥도 시대상·정서 담아내야 # ‘고희동 가옥’에서 가졌던 의문

건축사무소에서 하는 일이란, 절반은 실제로 지어지는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고, 절반은 지어질지 모르는, 지어질 수도 있는 건물에 대한 꿈을 그려주는 것이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주로 가능성을 검토하는 일이라 어찌 보면 현실을 살짝 아름답게 포장하고 조금 과장하면서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보는 사람이 즐거워지고 지어야겠다는 ‘구매욕구’가 생기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궁리를 한다. 1990년대 중반, 아직 독립하기 전 어떤 건축사무소의 직원으로 일하다 보았던 ‘그 집’도 그런 과정 속에서 만나게 된 집이었다. 어떤 사람이 창덕궁 옆 원서동에 있는 조금 넓은 땅에 커다란 ‘빌라’를 한 채 짓고자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상사로부터 전해 듣기만 했을 뿐 그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어떤 집을 원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자면 현장에 가서 보고 조사하는 것이 설계의 가장 기본적인 순서이다.

이튿날 낮에 원서동으로 향했다. 지금이야 동네가 깨끗해지고 멋들어진 찻집도 많이 생기고 길도 꽤 넓어졌지만, 그때는 사실 ‘뜨기’ 조금 전이었던지라 동네가 아주 ‘수더분’했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다가 월계동으로 옮겨진 각심재.
창덕궁 담을 끼고 한참 걸어서 들어갔는데, 길이 거의 끝나가는 부근에 집 지을 땅이 보였다. 빈 터는 아니고 벽돌로 길게 담을 쌓아 놓은 집이 한 채 있었다. 옆구리로 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언제 사람이 살았는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산 듯한 집이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나는 그저 ‘북촌에 있는 평범한 한옥이겠지’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우리에게 일을 의뢰한 사람의 계획대로라면, 그 집은 금세 헐릴 것이고 그 자리에 빌라를 지을 것이기 때문에 땅을 보기 위해 간 것이지 집을 보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바로 현관이 나왔다. 한옥에 현관이 있는 것도 조금 특이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더 특이한 공간이 펼쳐졌다. 한옥과 양옥, 그리고 일본식 집의 형식이 교묘히 섞여 있었다. 외관은 한옥이었고 전체적인 골격도 한옥이었지만, 지었던 사람 혹은 살았던 사람의 독특한 기호와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특이한 집이었다.

내부 공간의 구성도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한옥의 구성과 달랐고, 타일 등의 현대적인 재료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그 집은 그런 재료들을 위해 설계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새로운 설계를 하는 것 이상으로, 그 ‘한옥’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스케치를 했다. 그리고 그 땅에 여러 세대가 들어가 수익을 많이 올릴 수 있는 삼층짜리 평범한 빌라를 설계했지만 결국 그 일은 더 이상 추진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잊고 살았는데, 몇 년이 지나고 독립하여 내 사무소를 열었을 때 어디선가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고희동 가옥’이 헐릴 위기라는 소식이 화제가 되어, 관련 기사를 자세히 읽다보니 몇 년 전 내가 들어가 보았던 바로 그 이상한 한옥이었다.

고희동이라면 서양회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의 화가 아닌가. 그리고 그 집은 고희동이 직접 설계한 집이라고 했다. 그때서야 나는 그 집에 가서 느꼈던 여러 가지 묘한 느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집은 한옥을 기반으로 근대와 현대를 동시에 겪었던 당시의 생활 방식이 반영된 그야말로 ‘이 시대의 한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겹 시간과 문화의 진보가 덧씌워지면서 아주 묘한 시간의 단층을 보여줬던 것이다.

# 어디까지가 진짜 한옥일까?

고희동 가옥은 이후로도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고 마찰이 있었지만, 결국 말끔하게 새로 고쳐졌고, 지금은 기념관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고희동 가옥. 한옥과 양옥, 그리고 일본식 집의 형식이 교묘히 섞인 그 시대의 한옥이다.
그러나 나는 그 집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르는 채로 큰 잘못을 할 뻔했던 과거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이 있어서이고, 걱정도 조금 있었다. 말끔히 새로 고쳐졌다는 것은 그 집이 가지고 있는 다층적인 시대상과 주거의 변천과정이 지워진 채, 혹 박제처럼 방부 처리하고 각을 세워서 보여주는 집으로 변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런 걱정은 사실 ‘오래된 것은 모두 아름답다’는 낭만적이기만 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주거라는 것은 단지 사람이 사는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민족이나 문화적인 공동체가 살아온, 역사의 한 부분이고 그 속성에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연속성이 포함된다. 아마 이 지점에서 한옥에 대한 다양한 견해차가 생기는 모양이다.

북촌에서 시작된, 한옥을 고쳐서 살려내는 일에 한참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다가, 최근에는 아예 한옥을 새로 지어 주거의 또 다른 대안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새로 조성되는 뉴타운이나 여러 곳의 지자체에서 대규모 한옥마을이 만들어지고, 한옥의 건설을 정책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국가한옥센터’도 운영되고 있다.

그렇게 한옥에 대한 정책과 지원이 늘어나면서 지난 6월부터는 ‘한옥 등 건축자산의 진흥에 관한 법률’도 시행되고 있다. 여기서 정의하는 ‘한옥’이란 주요 구조가 기둥·보 및 한식지붕틀로 된 목구조로서 우리나라 전통양식이 반영된 건축물 및 그 부속건축물을 말한다. 그리고 ‘건축자산’이란 한옥을 포함하여 고유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 건축물, 공간 환경, 기반시설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일단 지정된 문화재는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한옥이라면 무조건 원형 보전’식의 태도에서 좀 더 유연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도 한옥을 형태와 구조방식으로 정의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옥과 관련한 그런 움직임에 드는 의문은, 한옥이라는 형식이 과연 이 시대의 삶을 담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옥에는 고정된 틀이 없다. 한옥을 포함해서 집이란 사는 사람이 자신의 몸에 맞게 손보고 고치며 다듬어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문화재 다루듯 지키고 보존해야 할 무엇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척 곤란한 일이다.

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한옥은 어떤 집을 이야기하는가. 어디까지가 한옥이고 어디까지가 아니라는 기준이 불분명한데, 사람들은 어떤 집을 두고 한옥이다 아니다 논란을 벌인다. 아무도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을 하지 못하면서, 지붕모양으로 저건 한옥이네, 혹은 일본식 집이네 쉽게 이야기만 할 뿐이다.

예전에 동네를 가득 메우고 있던 한옥들을 누추하고 어두워 부끄럽다며,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을 맞을 때처럼 방안에 있는 자질구레한 살림들을 발로 대충 치워 벽장에 쓸어 넣듯 부숴버렸던 기억이 내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더니 어느 날 한옥이 돌아왔다 하며 마치 마라톤 전쟁의 승전을 알리듯 요란한 나팔을 불며 사방에서 환호를 하고 있다.

한옥이 어쩌다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되었나? 그 이면에는 정책 차원에서 볼 때 한류, 한스타일 등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알리는 또 하나의 분야로서 부각할 만하다는 것과, 개인들에게는 아파트나 일반 콘크리트 현대식 주택보다 좀더 자연친화적이고 건강증진적인 주택에 대한 기대가 작용한 것 아닌가 싶다. 특히 무언가 남들과 ‘다르게’ 구별 짓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지금의 한옥은 예전처럼 동네 큰집, 작은집, 몇 집 이웃이 모여서 품앗이하며 멀리서 불러온 대목과 여러 ‘쟁이’들과 직접 손으로 나무를 재단하고 마름질하고 켜고 다듬어가며 소박하고 인간적인 분위기 속에서 짓던 집이 아니다. 공정마다 일일이 사람 손이 개입해야 하는 터라 보편적인 공법의 두세 배가 드는 공사비용도 문제고, 한옥을 멀리 하는 사이 우리의 라이프스타일도 많이 변해버렸다는 것도 문제다.

# 우리 시대 한옥의 가치

한옥에는 좌식생활을 하던 우리 조상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 30여년 전 우리들의 삶이 담겼었다. 방에 앉아서 밥을 먹고, 밥상을 물리면 그 자리에서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공부하고,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 깔고 자고, 비가 오면 문을 열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소리를 들었다. 지붕에 가려진 태양의 빛은 흙 마당을 통해 반사되어 천장에 어른거리며 방을 환하게 해주곤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하고,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아야 하고,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야 한다. 그런 가구들로 인해 주거의 단위공간은 훨씬 넓은 면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입식생활을 가지고 한옥으로 들어가면, 앉아있는 공간은 쪼뼛해지고 답답해지고 마루는 조명 없이는 컴컴해진다. 내용이 형식을 지배하고 라이프스타일이 주택을 만드는 것이다.

민가다헌. 한옥에 현관을 만들고, 화장실과 욕실을 내부로 넣고 이를 연결하는 긴 복도를 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태의 집이다.
‘민가다헌’이라고 경운동 수운회관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근대 초기의 한옥을 양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 있다. ‘민가다헌’은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두 아들 민병옥과 민병완을 위해 같은 모양으로 나란히 지은 두 채의 주택 가운데 하나다. 현재의 주차장 자리에 있던 또 하나의 집인 각심재는 월계동으로 옮겨졌다.

한옥에 현관을 만들고, 화장실과 욕실을 내부로 넣고 이를 연결하는 긴 복도를 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태의 이 집은 근대적 건축 개념이 도입된 한국 최초의 개량 한옥으로 일컬어진다. 동향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H자형(예전 식으로 말하자면 ‘工’자형)의 본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모든 방들에 채광이 잘 되도록 했고, 대청을 한 칸 규모로 축소하고 별도의 응접실을 두었다.

현재 북촌 등에 남아있는 ‘ㄱ’, ‘ㅁ’자 형태의 한옥들과 달리, 이 집은 전통적인 서울·경기지방의 ‘ㄱ’자형 평면에 현대적 개념의 응접실·욕실 등을 배치한 것이 독특하다. 지금의 인테리어도 당시 집 주인이 사용했던 빅토리아풍 가구를 재현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서구의 주거 형태를 도입하여 우리 주택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이 집의 설계자는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다. 사실 이 집에 굳이 ‘개량한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현대식 건축교육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인 박길룡의 이름이 걸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박길룡은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 1980년대 말까지 있었던, 명동의 일본인 상권에 대응하는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었던 옛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건축가다.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20년 조선총독부에 건축 기수(技手)로 들어가서 청사 신축공사에 실무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건축가 김해경이자 시인 이상의 선배이기도 한데, 특히 종로 일대를 중심으로 여러 근대식 빌딩을 세워 나감으로써, 한국인 건축가로서의 자긍심을 높여갔다. 또한 주거에 대한 문화·개량·위생운동을 벌이고 신문·잡지 매체를 통해 건축 계몽을 벌이기도 했는데, 민가다헌은 그러한 그의 건축적 이념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미 80여년 전의 건축가가 실현했듯이, 전통은 계승해야 하는 것이지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의 한옥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한옥이라는 이름의 상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지금의 재료와 구법에 맞는,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정신을 담는 집을 새로운 한옥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 지어지는 한옥이 가져야 할 가치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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