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문학·법과 정치 넘나들며 2500년 걸친 인간 감정 연구 담아
감정 요소 ‘연민과 상상력’ 통해 법과 사회제도 근원적 성찰
마사 누스바움 지음/조형준 옮김/새물결/5만5000원 |
여고 1년생 A양(16)은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혀 절도죄로 법정에 섰다. A양은 14건의 절도, 폭행을 저지른 전형적인 비행청소년이었다. 최소한 몇년간의 보호처분은 받을 처지였다. 하지만 담당 판사는 A양에게 ‘불처분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따뜻한 목소리로 “피고는 일어나 봐”라고 했다. A양은 쭈뼛쭈뼛 일어났다. “자. 날 따라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라고.” 예상치 못한 판사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A양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세상에서 …”라고 입을 뗐다. 판사는 “좀더 크게 내 말을 따라 해봐” 재차 주문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
큰소리로 따라 하던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판사의 이런 결정은 A양이 범행을 저지르게 된 가슴 아픈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A양은 본래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남학생 여러 명에게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180도로 바뀌었다. 심리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또래 남학생들과 어울리며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신간 ‘감동의 격동’은 이 판결이 왜 ‘예외적 판결’이 아니라 ‘정상 판결’인지를 논한다. 저자인 마사 누스바움 미국 시카고대 로스쿨 석좌교수는 ‘포린 폴리시’가 뽑은 세계 100대 지성에 두 차례(2005, 2008년)나 선정된 석학이다. 저자는 철학과 문학, 법과 정치를 넘나들며 인간의 감정을 화두로 2500년에 걸친 인간 내면의 풍경을 보여준다. 동서고금의 가슴 뭉클한 고백과 감동적인 사례를 통해 인간과 세상을 보는 우리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마사 누스바움은 ‘감정의 격동’에서 혐오감, 수치심, 우울 등 인간의 감정은 대개 유아기의 경험에 의해 지배되므로 유아기의 감정교육이 인간의 성숙에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진은 유아기의 감정 발달을 형상화한 그림. 새물결 제공 |
저자는 “연민과 사회제도의 관계는 쌍방 통행로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된 논지다. 그는 “연민을 가진 개인들은 자신들이 상상하는 것을 구현하는 제도들을 만든다. 감정을 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이며,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 상상력을 통해 이를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인 만큼이나 감정에 의해 끊임없이 희로애락을 반복하는 갈대라고 했다. 특히 감정이 우리의 정치와 너무나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나, 한 번도 ‘감정이 무엇인가’는 서양철학의 주류에서 제대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스피노자의 ‘에티카’,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같은 엉뚱한 분야에서 본격 조명됐다고 지적한다.
역자는 후기에서 “누스바움은 ‘연민과 상상력의 정치학’을 강조한다. 그가 제시하는 상상력과 연민에 기초한 법과 제도와 개혁은 사회정치적으로 별다른 화두를 길어내지 못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많은 울림을 줄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철학의 천덕꾸러기로 취급됐던 ‘인간의 감정’을 현 시대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위한 만학의 토대로 복권시키려 한다. 이마누엘 칸트가 중세 신학의 시녀이던 철학을 ‘만학의 여왕’으로 복권시켰듯이 말이다. 1권 인정과 욕망, 2권 연민, 3권 사랑의 등정 등 1200여쪽을 통해 저자는 감정에 대해 정교하고 치밀하게 논리를 전개한다.
저자는 “믿음과 소망, 사랑, 연민 같은 인간 감정이 메말라가며 사회에는 ‘돈과 불안’만 남는 것처럼 보인다”면서“우리 삶에는 ‘죄와 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큰 힘인 사랑과 연민과 동감의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