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청년 김찬·中 명문가 딸 도개손
‘공청단’ 활동 중 만나 동지서 부부로
조국독립·혁명 꿈꾸며 항일투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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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지음/공명/1만7000원 |
사랑할 때와 죽을 때-한·중 항일혁명가부부 김찬·도개손 평전/원희복 지음/공명/1만7000원
부부 항일독립운동가 김찬(1911∼1939)과 도개손((陶凱孫·1912∼1939)은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김찬은 한국인이고 도개손은 중국 여인이다. 평안남도 진남포가 고향인 김찬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공부했고 노동운동을 통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독립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도개손은 중국 명문가의 딸로 베이징대 최초의 이과계 여학생이었다. 김찬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가입했고, 공청단 활동 중 혁명 동지이자 연인이 된 도개손과 처음 만난다. 언론인 출신인 저자가 쓴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서른도 못 살고 중국 땅에서 총살형을 당한 부부 독립운동가의 기구한 삶을 기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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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은 1930년대 조봉암, 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일으킬 만큼 거물 인사였으나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
1930년대 조선에서 김찬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김단야, 조봉암, 김형선, 김명시 등 당대 내로라하는 사회주의 항일투사들과 함께 이름이 신문에 오를 정도로 유명했다. 김찬은 신의주로 잠입하던 중 붙잡혀 조봉암 등과 함께 신의주 형무소에서 1년반 동안 복역했다. 일제 경찰의 특별 경계령에 걸려들었다. 당시 박헌영은 미친 사람 행세로 일경의 잔혹한 고문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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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출신 도개손은 김찬을 만날 당시 중국 베이징대 최초의 이과계 여학생이었다. |
강달영은 5일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백하고 미쳐버렸다. 조봉암은 손가락 마디를 잃어가며 20여일 동안 고문을 견뎠다. 그러나 김찬은 고문을 무려 45일간 버텨냈다. 김찬을 고문했던 일제 경찰이 “다수의 사상범 중 검거 후 45일 동안 범행을 부인한 인물은 김찬 외에는 유례가 없다”고 수기로 남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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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이 중국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당시 큰아들 연상을 낳은 뒤 도개손과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
김찬은 출감 후 중국으로 건너가 도개손과 재회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아들(김연상)과 딸(소나)을 낳았다. 두 사람은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마오쩌둥의 근거지 옌안으로 걸어서 수천리를 이동, 공산당 간부학교인 중앙당교에 입교한다. 도개손은 장칭(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과 베이징대 재학 시절 절친 후배였던 탁림(덩샤오핑의 부인), 덩잉차오(저우언라이의 부인) 등과 어울렸다. 당시 옌안 중앙당교 입교생 가운데 중국 명문대 출신 엘리트 여성들은 훗날 공산당 지도자들과 결혼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오직 조선인 남자와 결혼했던 도개손만은 비극적이고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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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과 조봉암, 김단야 3인이 힘을 합쳐 조선노동당을 재건하는 움직임을 게재한 1933년 6월 3일자 신문. |
김찬과 도개손은 중앙당교 입교 이후 2년여간의 짧은 신혼을 보냈다. 이들의 최후는 엉뚱한 곳에서 촉발됐다. 새로운 항일투쟁에 합류하라는 지령을 받은 두 사람은 모처로 끌려갔다. 마오쩌둥이 정풍운동으로 만든 보안처였다. 당시 소련에서는 트로츠키 잔당에 대한 대숙청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여파가 중국으로까지 번지면서 엉뚱하게 김찬 부부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중국공산당은 이들 부부에게 일제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총살했다. 숙청을 주도한 사람은 캉성이었다. 캉성은 마오쩌둥의 지시로 사회부장을 맡아 마오쩌둥의 정적들을 대부분 숙청했다. 캉성은 문화혁명 당시 장칭의 심복이 되어 갖가지 악행을 저지른 인물로, 지금도 악명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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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이 조선에 잠입하다 일제 경찰에 붙잡힌 얘기와 활동한 사실을 보도한 당시 신문. 공명 제공 |
도개손은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조선인 남편을 버리라는 가족들의 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남편과 한날한시 죽는 것을 택했다. “저 사람은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의 조선혁명과 사랑을 선택했다”는 말만 가족들에게 남겼다. 훗날 가족들은 도개손을 짝사랑했던 베이징대 남학생이 공산당 간부 자리에 오른 후 ‘거짓 밀고’를 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추측했다. 아들 연상과 도개손의 언니들은 두 사람의 총살형 내막을 밝히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이 책 저자는 10여년간의 중국 현지 취재를 통해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진실을 규명하려 했으나 거의 기록이 사라진 사실을 밝혀냈다. 다만 혹독한 고문을 자행한 사실을 덮으려는 캉성의 지시로 기록이 없어진 것으로 저자는 추정했다.
중국에서 죽음을 맞았고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탓에 한국에서 이들은 잊혀진 존재였다. 당시 조국이 없어진 막막한 상황에서 사상적으로 기댈 언덕이 사회주의 또는 아나키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 배경이 됐다. 1982년 중국공산당은 캉성의 조작에 의한 모함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두 사람을 복권시켰고 5000위안의 위로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저자는 “김찬은 1930년대라는 시간대와 조선과 중국이라는 공간에서, 특히 사회주의 노동운동에서 가장 상징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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