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슈트렉 지음/김희상 옮김/돌베개/1만5000원 |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인 볼프강 슈트렉 독일 쾰른대 교수가 쓴 이 책의 주제는 제목 ‘시간 벌기’에 압축돼 있다. 슈트렉 교수는 “현재의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를 관찰함에 있어 시간을 끌어들이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1970년 이후 전후자본주의의 여러 위기가 감지되었지만, 닥쳐올 사건을 되도록 미루면서 시간을 벌려는 시도들이 있었음에 주목한다. 사건을 미루고 막기 위해서 꼭 돈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님에도 위기가 닥치자, 주요국들은 막대한 돈을 마구 투입해 불안정한 사회갈등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나. 의도와 달리 더욱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올해 그리스 사태와 유로존 위기 등은 돈 쏟아붓기 방식이 더 이상 효과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저자는 “고삐 풀린 자본과 위기 유예 방식”이라고 했다. 책에서 저자는 향후의 전망보다는 지난 시절의 경제 위기 사건들을 되돌아보는 데 공을 들였다. 1970년대에 진단했던 위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2008년의 위기를 맞이했는지 정밀히 추적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위기이론이 범한 가장 큰 오류는 “자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전략을 펼쳐나갈 정도의 능력이 없다”고 봤다는 데 있다. 즉 자본 자체가 ‘불안의 진원지이자 지속적인 사고뭉치’임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뛰어난 학자들의 위기 이론 예측과 달리, 노동자와 소비자들은 자본주의에 충성을 다하며 일하고 소비했다. 그럼에도 경제성장은 정체되고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그러는 사이 자본주의 엘리트와 정치 동맹군의 ‘꾸준한 야합’은 자유화를 환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960년대 말 이미 자본주의의 평화는 깨졌으며, 대신 전후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정부는 경제 자산가와 관리인들에게 굴복해 성장, 고용보장, 사회적 보장, 복지 등의 책임을 시장에 떠넘겼다. 그리고 깨져버린 자본주의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투입됐다. 처음에는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났다는 ‘돈의 환상’을 주는 인플레이션을 도입했고, 효력이 떨어지자 국채 증서 발행으로 민간 금융시장을 인위적으로 키우며 가계부채를 무한정 늘렸다. 그러다 결국 국가부채와 은행 빚을 중앙은행이 사들이도록 했다.
저자는 “유럽연합과 유로화는 이런 고삐 풀린 자본의 선도 역할을 한 셈”이라면서 “글로벌화에 제동을 걸고, 시장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조건을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신자유주의의 탈민주화 프로젝트의 속개를 막을 투쟁에 투여할 시간을 버는 일은 절박하다”면서 신자유주의 저지를 촉구한다. 저자는 고정환율제도를 갖춘 ‘브레턴우즈체제’를 모범안으로 제안한다. 이 책은 저자가 2012년 6월 세 차례에 걸쳐 발표한 프랑크푸르트 아도르노에 관한 강의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국내에는 처음 번역·출간됐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서평에서 “전후 황금기 종말 이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위기의 역사, 그리고 현 단계의 민주적 의제와 대안을 포괄적으로 들려주는 책을 쉽게 찾지 못했는데, 이 책은 아주 시의 적절한 책”이라고 밝혔다.
김신성 기자 ssk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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