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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 수행 위한 고요의 공간… 자연 향해 창(窓)을 열다

입력 : 2015-10-07 10:30:00 수정 : 2015-10-07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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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26〉 다실 # 차(茗)를 사랑한 추사와 초의선사, 다산

내가 아는 서예가가 많지 않고 아는 글씨도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중 좋아하는 걸 골라보라고 하면 생각나는 몇 작품 중 하나가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명선(茗禪)’이라는 작품이다.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든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울긋불긋 화려한 종이에 세로로 크게 두 글자를 써놓았다. 글씨는 크고 단단하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무척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 옆에 가늘고 유려한 필치로 옆으로 흐르는 작은 글씨들과의 조화도 좋다. 그 내용은 ‘명선’이라는 글씨를 쓰게 된 상황에 대한 부연설명이었다.

“草衣寄來自製茗, 不減蒙頂露芽, 書此爲報, 用白石神君碑意. 病居士隸.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직접 만든 차(茗)를 보내왔는데, 중국의 유명한 몽정차(蒙頂茶)나 노아차(露芽茶)보다 덜하지 않았다. 이에 글씨로 보답한다. 중국에 있는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筆意)로 병거사(病居士) 김정희(金正喜)가 예서(隸書)로 쓰다.”

겐닌지(建仁寺) 동양방(東洋坊)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최한 기타노 대과회에서 사용했던 건물을 교토 겐닌지로 이건했다. 극도로 단순화된 다실 실내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가 차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써 준 글씨라는 내용이다. 당시 추사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었고 세상사의 고달픔과 인간사의 속절없음을 뼛속 깊이 새기던 시절이었으므로, 그 감사의 마음은 무척 컸을 것이다.

그때 추사를 열심히 챙겨주었던 사람이 몇 있는데 그들에게 추사는 명작을 선물한다. 하나는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뒷바라지해 주었던 이상적에게 주었던 ‘세한도’이고 또 하나는 초의선사에게 주었던 ‘명선’이라는 글씨이다. 추사와 초의선사는 무척 허물없는 친구사이였던 모양이다. 추사와 초의선사 사이에 오간 편지를 보면, 추사가 거의 어리광을 부리듯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 달라고 투정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었으며 우리의 차 문화를 정립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를 차의 세계로 이끌어준 사람은 어린 시절 만났던 스승 다산 정약용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이 많았고 세상 모든 일을 알았으며 올곧은 정신으로 살았던 다산 정약용은 차에 관해서도 당대 최고였다. 차의 효능과 차의 제조법 등에 해박하였으며 그런 지식은 그가 남긴 많은 글과 편지에 넘치도록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차를 무척 좋아해서 추사가 초의에게 조르듯 그도 차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많이 보냈다. 그에게 빚 독촉처럼 차 독촉을 받았던 집안은 강진 백운동에 별서를 지어서 살았던 원주 이씨 집안이었다.

“…지난번 보내준 차와 편지는 어렵사리 도착했네. 이제야 감사를 드리네. 근년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茶餠)에 힘입어서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 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찍어낸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유념해 주면…” ‘강진백운동 별서정원’(정민) 중에서.

다산 정약용이 백운동 별서정원의 당시 주인이며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공부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차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찻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빻는 삼증삼쇄법과 더불어 다산이 즐기던 차의 방식은 잎차가 아니 떡차였음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일본의 독특한 미학인 ‘와비’(고요하고 투박함을 뜻하며, 마음의 상태나 공간의 느낌을 뜻하기도 함)의 구체적인 결정체가 다실 공간이다.
# 차의 미학, 일본의 다도 공간

우리 옛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차를 삶는 법, 차를 재배하는 법, 차의 효능 등 차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차를 마시는 심경과 자연을 노래한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공간이나 그 과정에 대한 자세한 규정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차를 마시는 일은 선정에 드는 일과 같고, 자연과 교감하며 그로 인해 육체와 정신이 건강해지고 건전해지는 그런 경지에 이르는 일이며, 세상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로 드는 일이다. 최소한 우리나라의 차 애호가들은 그런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나도 간혹 초대받아 차를 대접받기도 하는데 그 절차와 그 맛에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윽한 향기와 그보다 더욱 향기로운 문화의 맛을 느끼지 못하니, 마치 후각과 미각이 마비된 채 세상에 다시 없는 수라상을 받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 맛은 쓰고 뜨겁고 또한 감질난다.

술은 사람을 풀어지게 하고 차는 사람을 여미게 만든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흥취가 돋고 약간은 소란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감성이 살아나 좋은 시나 그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반면 차는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해준다. 술과 차는 어찌 보면 완전히 반대의 성질을 가진 기호품이다. 그래서 마치 음과 양의 조화처럼, 많은 사람들이 두 개의 기호품을 동시에 즐긴다.

히로시 스기모토의 유리 다실. 마치 몬드리안의 구성을 연상시키듯 모던한 형태이고, 바닥의 다다미와 입구의 나무문만 유리가 아닌 재료로 되어 있다.
차 문화는 중국을 통해 한국과 일본으로 차례로 전달되었는데, 중국과 한국의 차 문화의 전성기는 10세기를 전후한 송나라와 고려시대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일본은 12세기에 차가 전래되고 차 문화가 완성된 시기도 15∼16세기로 한국과 중국에 비해 많이 뒤진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일은 그들만의 독특하고도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다. 그들은 차 마시는 행위를 불교의 참선과 동일시하였고 나아가 독특한 정신문화로 완성한다.

일본에 가서 유명한 정원을 보거나 유명한 사찰을 구경할 때, 한 구석에 아주 작은 오두막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얼핏 보기에는 대충 나무로 엮고 풀로 덮은 작은 집인데, 자세히 보면 벽을 조금 째서 만든 사람이 들어가는 구멍이 하나 있다. 그곳이 바로 차를 마시는 공간이었다.

송나라에서 임제종을 공부하던 에이사이(榮西) 선사가 일본으로 차나무를 들여오면서 일본에선 다조(茶祖)로 불리게 되는데, 그는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라는 책을 펴냈고 차를 수행의 방편으로 인식시키며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 이후 일본의 차 문화는 몇 명의 선도자를 거쳐 16세기 센노리큐(千利休)에 의해 완성된다. 일본에서 차문화의 완성이란, 예법의 완성이었으며 공간의 완성이다. 그는 일본의 독특한 미학인 ‘와비’의 개념을 완성한다. 고요하고 투박함을 뜻하는 ‘와비’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기도 하고, 공간의 느낌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미학의 구체적인 결정체가 다실 공간이다.

그들은 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방 혹은 선실이 있어야 하듯, 차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박하고 엄정한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그들은 질박한 재료와 단순한 형태, 그리고 작고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공간을 만든다. 대나무로 엮은 담장 중간에 빼꼼 솟은 낮은 대문을 들어서면, 담에 붙여 만든 나무의자에 앉아서 주인의 부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공간은 마치아이(待合)라고 한다. 주인이 부르면 노지(露地)라 부르는 돌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뜰을 지나게 되고, 나무 사이로 다실을 보며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차실은 토벽과 생목 그리고 대나무 격자판으로 만들어진다. 센노리큐는 노지와 잘 어울리는 차실의 형태가 ‘와비’의 극치라 생각했다고 한다.

무척 추상화되고 상징적인 그 공간에 들어가면, 누구나 침묵하게 되고 몸과 정신을 추스르게 된다. 애초에 다다미 4장반 크기의 다실이 정형이었으나, 센노리큐에 이르러 2장 혹은 3장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몸을 거의 접은 상태로 들어가야 하는 작은 실내와 족자 한 장 걸려 있는 극도로 단순화된 실내에서 주인이 주는 차를 마시게 된다. 외부와 열려 있는 공간에서 자연을 음미하며 차를 마시던 우리나라의 차 문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빛과 공간은 하나의 미학의 완성을 도와주는 도구이며, 마침내 들어온 그 공간에서 주인이 내주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통해 차를 마심으로써 하나의 미학적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요시오카 도쿠진은 유리 다실 코우안(Kou-An)을 통해 일본을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 중 하나인 다도가 생겨난 이유를 되새기고, 그 흔적을 따라가며 일본 문화의 기원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원했다.
# 현대의 다실, 자연을 향해 열리다

현대건축에서 다실을 구현한 일본 건축가가 여러 명 있는데, 늘 그렇듯 종이로 다실을 만든 시게루 반이나 헬륨 풍선을 이용한 천막 다실을 만든 구마 겐코 등이 있다. 특히 히로시 스기모토는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유리 큐브로 된 다실을 선보인 바 있다. 마당의 일부를 물로 채우고 그 위에 유리 다실을 띄웠다. 사람들은 좁은 길을 따라 돌다리를 건너 물 위의 다실로 들어간다. 다실은 마치 몬드리안의 구성을 연상시키듯 모던한 형태이고, 바닥의 다다미와 입구의 나무문만 유리가 아닌 재료로 되어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지붕까지 온통 유리로 만들어진, ‘빛의 암자’라는 이름의 다실도 있다. 교토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의 넓고 고요한 데크 위에 지어진 다실 코우안(Kou-An:光庵)이 그것이다. 일본의 디자이너 요시오카 도쿠진은 원래 유리 등 빛나는 투명한 재료를 즐겨 사용하는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그가 2011년 54회 베니스아트비엔날레에서 유리로 만든 투명한 다실 코우안의 디자인을 발표했을 때는, 지붕의 기와 하나하나를 모두 유리로 디자인했는데, 실제로는 훨씬 단순한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는 일본을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 중 하나인 다도가 생겨난 이유를 되새기고, 그 흔적을 따라가며 일본 문화의 기원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가로 세로 4m, 높이 3m의 유리 다실 기둥은 주위를 비추는 스테인리스 미러로 마감되어 빛이 반사되고, 지붕은 유리판을 겹쳐 쌓아서 만들었다. 빛은 사계절, 그리고 하루 중에도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는데, 도쿠진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꼈으면 했다고 한다.
도쿠진의 유리 다실은 교토의 쇼렌인(靑蓮院) 인근에 지어졌다. 쇼렌인은 794년부터 1185년 사이 헤이안시대에 건립된 절로서, 교토에 소재한 천태종파의 몬제키(門跡·황실 또는 고관 자제가 출가하여 머물던 사찰) 5군데 중 하나라고 한다. 알 만한 사람만 찾아간다는 그곳의 정확한 위치는 쇼렌인 뒤쪽의 산 정상에 위치한 ‘장군총’ 옆, 대일당이라는 쇼렌인의 부속사찰이 있던 자리이다. 장군총은 교토를 세운 간무천황이 교토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수도 수호의 의미로 높이 2.5m 장군상을 흙으로 만들어 갑옷을 입히고 철제 활과 화살, 칼을 채워 묻도록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혹은 기요미즈데라(淸水寺)를 지은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노(坂上 田村麻呂)라는 장군의 무덤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훗날 쇼군이라는 칭호를 천황으로부터 처음 받은 인물이자 백제의 피를 이어받은 도래인이라고도 한다.

다실의 배경이 되는 ‘청룡전’은 본래 1914년 다이쇼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여 기타노 텐마 궁터에 건립된 무도 연습장으로, 당시의 목조건축기술이 집약되어 있고 현재는 구할 수 없는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2014년 이곳에 이축되었다. 다실은 구조체인 철골을 제외하면 모두 유리로 지어졌다. 가로 세로 4m, 높이 3m의 유리 다실 기둥은 주위를 비추는 스테인리스 미러로 마감되어 빛이 반사되고, 지붕은 유리판을 겹쳐 쌓아서 만들었다. 다실 바닥에도 두툼한 유리 패널을 짜 맞추어 유리의 부드러운 물결무늬가 빛과 만난다. 빛은 사계절, 그리고 하루 중에도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는데, 도쿠진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꼈으면 했다고 한다. 보통 다실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족자도 꽃도 없지만 오후의 어느 시간, 햇빛이 천장의 프리즘을 통과해 무지개를 만들어내며 꽃처럼 화사하게 다실을 장식한다. 역시 유리로 제작된 세 개의 벤치가 다실 주변에 놓여 있어 거기 앉아 다실 안에서 진행되는 다도의식을 감상할 수 있다.

빛이 가득한 자연을 향해 활짝 열리는 현대의 다실은 빛이 최대한 절제된 어둑한 다실에서 마음을 닦았던 전통 다실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것이 일본 디자이너들의 전통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이해이자 도전이라고 생각된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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