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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에 간 천재시인 백석은 어떻게 살았을까

입력 : 2015-10-16 11:18:01 수정 : 2015-10-16 11: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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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백석우화―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시인 백석은 남북 분단이 고착화될 때 북에 남는다. 사상 때문이 아니라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이라는 단순한 이유였다. 1996년, 80대 중반까지 생존했지만 북한 체제에서 시인의 내면이 어떠했을지 알 길이 없다. 연희단거리패가 새로 선보인 연극 ‘백석우화-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은 북한에 남은 백석의 삶을 좇는다. 체제와 갈등하는 시인을 통해 문학과 정치의 관계, 이를 넘어선 삶의 진정성을 그린다.

이 연극은 문학 낭독 공연인가 싶을 정도로 시의 비중이 높다. 백석의 시와 에세이, 편지를 판소리, 정가, 발라드로 노래하거나 읊는다. 가끔 해설자도 등장한다. 중간중간 시인의 삶을 재현한다. 대사가 아닌 시의 비중이 높다 보니 긴장감은 덜하다. 게다가 시와 에세이를 발췌하지 않고 거의 통째로 전달한다. 시 한 편 읽으려 멈춰설 여유조차 없는 관객들로서는 초반에 다소 흐름이 느린 것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우들은 성실하게 백석의 문장을 노래로, 몸짓으로 전한다. 차곡차곡 감정이 쌓인다. 점점 몰입도가 높아지고, 막바지에 다다르면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라는 백석의 시어처럼 눈물샘이 자극된다.

연극 ‘백석우화-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은 북한에 남은 시인 백석이 체제와 갈등하는 과정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연극의 본론은 북녘에서 펼쳐진다. 6·25전쟁 때까지 백석은 문학에의 순수한 열정에 빠져 있었다. 러시아 민중소설인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번역하기 위해 피난도, 남한행도 사양한다. 그러나 문학과 공산 체제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의 동시는 사상성이 부족하다고 비판 받는다. 삼수갑산 집단농장으로 내려간 백석은 당의 지시로 남한에 보내는 ‘회유의 편지’까지 쓴다. 시인은 절규하듯 체제에 복무하는 편지를 읽는다. 끝내 광대처럼 허옇게 분장한 배우의 얼굴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공산 체제 아래 시련당하는 문학의 모습은 최근 연극계의 정치 검열 논란을 연상시킨다.

1945년 이전 백석의 삶과 작품 세계는 연극에서 짧게 두 대목으로 보여진다. 하나는 따스했던 어린 시절을 평안도 사투리로 묘사한 시 ‘여우난골족’이다. 명절을 맞은 촌락의 풍경이 판소리로 구수하고 정겹게 전해진다. 다른 하나는 ‘모던 보이’ 백석의 연애사다. 화가 정현웅은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조각상과 같이 아름답다”고 적었다. 화가 안석영도 백석에 대해 “문단에서 제일 젊은 시인이요, 또한 미남이다. 머리와 체격과 걸음걸이와 용모도 이국 풍정을 느끼게 하며”라고 묘사했다. ‘모던 보이’의 대표 격이던 백석은 기생 자야와의 사랑으로 유명하다.

백석의 말년 모습은 가족 사진 한 장으로 남아있다. 네 번의 결혼과 뜨거운 사랑을 거친 시인의 말년은 허허로워 보인다. 37년간 삼수갑산에 살면서 하루도 시를 잊지 않고 글을 썼지만 모두 불쏘시개로 사용했다는 마지막 대사는 긴 여운을 남긴다.

백석 역은 배우 겸 연출가 오동식이 맡는다. 초반에는 ‘모던 보이’와 어울리지 않는 듯도 보인다. 그러나 체제에 영합하는 글을 쓰며 무너져가는 모습, 시인이 거쳐온 깊은 세월을 담은 연기가 일품이다. 이윤택이 연출과 대본을 담당했으며 이자람이 작창, 권선욱이 작·편곡에 참여했다.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내달 1일까지 공연한다. 1만5000∼3만원. (02)763-1268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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