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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자기 노랫말 대신 가슴 벅찬 희망의 찬가 울려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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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1-16 06:00:00 수정 : 2015-11-1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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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86> ‘희망가’의 패러독스 삼각산(三角山)은 서울 지키는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주요한 세 봉우리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 남쪽으로 유유히 한강이 흐른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시절 조선시대에도 수도인 한양(漢陽)의 상징이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임진왜란, 병자호란 다 겪은 칠순 노정치인이 포로로 청나라에 끌려간다. 노선(路線)의 측면에서는 이론(異論)들 있겠으나, 절개의 이름으로 전해진다. 침통한 이 시조도 그 이름을 유전(遺傳)하는 데 기여한다. 글이 가지는 큰 공덕 중 하나다. 여러분도 부디 좋은 글 남기시라.

그 시조는 ‘하 수상하다’는 말도 남겼다. ‘하수상’이라는 독립된 낱말처럼 잘못 쓰는 사람도 있다. ‘하도 수상하다’는 표현이다. 세월호 침몰 때도 그렇더니, 세월이 하 수상(殊常)할 때면 여지없이 이 노래 자주 들린다. 김상헌 시조와 무드가 통하는 것도 같다. ‘희망가’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의 김상헌이 요즘 사람이라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하고 노래할지 모르겠다. 사진은 김상헌의 묘비
세계일보 자료사진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의 철권(鐵拳) 속에서 일제 때의 이 노래가 리바이벌되어 대학가에 흘러넘쳤다. 통기타 가수들의 작업이었다. 데모 때나 뒤풀이 때 단골메뉴로, 억울하다 울며불며 이 노래를 불렀다.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늙은 군인의 노래’ 다음 순서쯤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이선희의 이 노래가 황당하게도 ‘힐링송’이란 이름으로 퍼지더라. 자포자기 노랫말을 그다지도 쓸쓸하게 하늘로 쏘아 올리니 그게 사람들 아픈 가슴 달래주었던가. 징허디 징헌 장사익의 ‘희망가’는 마침내 우리를 하릴없게 한다. 희망이 저리도 슬프면 어떡하나?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야/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談笑和樂)은 부담 없이 웃고 즐긴다는 뜻이겠다. 주색(酒色)은 술과 여자, 잡기(雜技)는 도박이나 잡다한 놀이다. 공부나 일은 안 하고, 자빠져 노니 만족스럽냐는 것이다.

이 퇴폐적이고 퇴영적이고 퇴행적인 ‘희망가’는 세월이 하 수상할 때마다 히트치는 속성을 지닌 노래인가? 최근에도 장사익 이선희 노래로 많이 퍼졌다.
연합뉴스
인생이 아지랑이 같은 봄날 꿈속에서 또 다른 꿈 짓는 것 같다는 이 곡은, 가락도 그렇지만 가사는 더 슬프고 퇴폐적이다. ‘갓난아기로 되돌아간다’는 퇴영(退?)이다. 울고 싶은 데 뺨 쳐주기인가? ‘하 수상’은 이런 사회적 심리의 은유적 표현 같다.

서양 곡에 일본인들이 가사 붙인 창가(唱歌)였다. 거기에 그 노랫말을 덧입혔다. 왈츠 곡에 심난한 노랫말 매단 윤심덕의 ‘사(死)의 찬미’와도 비슷하다. 왜놈들에게 짓밟힌 채 살아야 했던 분위기를 짚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체념(諦念)밖에 뭐 있니?’ 이런 생각이었을까?

제목이 주는 선입견(先入見) 때문에 이 노래의 비탄이나 방탕(放蕩)의 뜻을 짐작 못하는 이들도 꽤 있은 것으로 관찰된다. 현장의 경험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가사 중 ‘이 풍진 세상’의 풍진이란 말 때문에 생기는 ‘혼란’은 한자(의 개념) 없이 우리말을 배우고 익힌 세대와 한자어(의 존재)를 아는 세대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본보기와도 같다.

어떤 이들은 ‘풍진’을 ‘풍지다’ ‘풍질다’라는 말의 활용(活用·문법용어)이라고 생각한다. 풍부하다 풍년(豊年)들다 등의 의미를 유추(類推)하는 것이다. 값지다, 번지다, 등지다, 차(찰)지다, 오지다, 흠(欠)지다 등의 말과 같은 구조로 생각하는 것이다.

착각이다. ‘풍지다’ ‘풍질다’는 말은 우리말에 없다. 이런 오해와 함께 희망 부귀영화 담소화락 등이 주는 편견 때문에 이 노래를 벅차고 기쁜 희망의 찬가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말 자체가 정확한 소통(疏通)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한자어를 아는 이들은 이런 얘기에 ‘설마 그럴라고?!’라는 생각도 할 것이다. 두 세대 또는 비교 그룹 간의 차이에 대한 인식(認識)은 유감스럽지만 빈약하다. 우리 말글이 언중(言衆) 사이에서 ‘바르고 고운’ 언어로 기능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그룹의 어떤 이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서로 적대적(敵對的)이기까지 하다.

영어 문화권에서 라틴어나 프랑스어가 스민 영어단어를 배척하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 라틴어 등이 영어를 풍요롭게 하듯, 한자어나 영어 등 우리말의 여러 구성 요소들은 우리말을 다양하게 해 품격을 높이고 그 기능을 확대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 말은 바람 風(풍)과 먼지 塵(진)이라는 한자를 바탕에 깔고 있는 우리말의 한자어(漢字語)다. ‘풍진’이라고 쓰고 읽지만, 그 뜻은 한자 숙어 風塵에서 나온다. 바람에 날리는 먼지, 풍진은 ‘세상의 별별 어지러운 일이나 시련’을 표현하고자 할 때 쓰는 말이다. 은유(隱喩)다.

이런 희망가가 다시 유행하지 않아야 한다. 세월도 하 수상하지 말아야겠다. 우리 젊은이들은 제 뜻 품은, 바르고 고운 말을 가져야 한다. 선배들은 젊은 저들을 바로 섬겨라. 세상의 주인인 청춘들아, ‘하 수상’ 따위 집어치우고 당당하고 기쁜 삶 살아라. 어찌 아파서 청춘이랴.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 사족(蛇足)

이런 게 진짜 희망가다. 다정한 귓속말 같은 문병란(文炳蘭) 시인의 ‘희망가’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마라…”

오래전 일, 문 시인 등이 힘 합쳐 ‘김영랑 박용철 합동시집’을 만들었다. 모란 그림 예쁜 시집을 학교에서 받아 ‘모란이 지고 나면 그뿐 내 한해는 가고 말아…’ 시를 처음 읽었다. 책값으로 몇 푼 안 되는 돈 낸 것 같은데 ‘학교서 책을 강매했다’고 보도돼 시인 등 그 지역 학교 선생님들이 힘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시문학 운동으로 세상 깨우쳐온 문병란 시인은 젊은 세대를 섬기는 가슴 벅찬 ‘희망가’도 남겼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시(詩)도 책도 별로 없었던 때였다. 그 후 ‘오메 단풍 들겄네’(김영랑)나 ‘나두야 간다’(박용철) 같은 시가 골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문 시인은 그 시들을 얼마나 들려주고 싶었을까?

기자로 일하며 ‘선생님’들의 귀한 뜻을 잘 섬겨야 한다고 늘 조심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깊고 아름답고 씩씩한 시를 지었다.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의 또 다른 노래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직녀에게)도 그의 시다.

내게(우리에게) 첫 시집 만들어준 원로시인 문병란 선생이 지난 9월 돌아가셨다. 뵌 적 없으나, 뵙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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