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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마다 닮은 듯 다른 불상, 다른 듯 같은 깨달음

입력 : 2015-11-18 10:00:00 수정 : 2015-11-18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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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29〉 반가사유상
# 불상에는 시대의 얼굴이 보인다

오래전에 큰 마음 먹고 석탑과 불상을 공부하겠노라 전국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절이 있고 절터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 숫자보다 더 많은 불상이 있고 석탑이 있다. 그걸 며칠 돌아보고 알아보겠다는 것은 사실 어처구니없는 객기였지만 그때만 해도 젊은 나이였기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실행에 옮겼다.

절마다 그 시대의 문화적 풍경을 보여주는 불상이 있다. 그 재료가 다양하고 그 형태도 다양하며 그 자세 또한 다양하다. 우리는 단지 부처라 뭉뚱그려 부르지만, 석가모니가 있고 약사여래가 있고 아미타여래도 있으며 비로자나불도 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부처가 머무는 장소 또한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각기 다른 세상을 관장한다. 들어가 보니 무척 깊고 넓은 세상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번 들어가니 그 깊은 품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었다. 석가모니가 입적한 후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이 종교적인 표상으로 자리 잡는 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형식은 시대의 흐름과 같이하며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고 또 태어나길 반복했다.

쇼토쿠 태자의 목상이 모셔져 있는 고류지 상궁왕원태자전
그때 본 불상들은 대부분 금분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우리가 흔히 아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양으로 부처가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불상을 만날 때가 있었다.

전라도 장흥 보림사에 가면, 대적광전이라고 현판이 붙어있던 작은 집(지금은 중창불사해서 커졌다)에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덩치가 우람하고 얼굴의 선이 무척 강한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곧추 세운 왼손 검지가 오른손을 거머쥔 형태인 지권인을 하고 있는 철로 만든 비로자나불이었다.

신라 말 국운이 기울며 호족들이 세력을 키우던 무렵 조성되었다고 보는데, 오랜 시간 만들어져 지속되던 신라의 독특한 선이 사라지고 호방하고 쾌활한 지방의 문화가 불상의 형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떠나서 보더라도, 희로애락이 없는, 다만 신의 표정으로 높다랗게 앉아있는 불상들을 보다가 마치 이 동네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의 표정을 가지고 느긋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불상을 보는 느낌은 아주 신선했다.

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길에 기림사라는 아주 오래된 절이 있다. 그곳에도 역시 맞배지붕으로 길게 지은 대적광전이 있다. 물론 대적광전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데,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와 약사여래가 같이 모셔져 있다. 흙으로 만들어진 부처님 세 분이 아주 호방하게 웃고 있었고, 그 동작도 무척 커서 마치 함께 어디론가 활기차게 떠날 듯도 하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듯한 생동감이 있었다.

불상에는 시대의 얼굴이 보인다. 신라나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 조선 세종 때, 영조 때 만들어진 불상 각각에는 그 시대의 얼굴이나 자세들이 있다. 야무진 얼굴이 있고, 호방한 얼굴이 있고, 뭔가 시름이 가득한 얼굴도 있다. 장인들은 불상을 만들 때 부처님의 자비와 부처님의 깨달음 그리고 세상에 살면서 탈속한 존재를 표현하고자 무척 고민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고류지 인왕문
# 두 구의 반가사유상을 무아지경으로 마주보다


‘공부’의 마지막 목적지는 신라 경덕왕 때 만들어졌다는 불국사와 석굴암이었다. 불상과 석탑을 짧은 시간에 일별한 데다가 시대 순으로 체계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나 내용이 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인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불국사의 삼층석탑을 보았다. 그리고 왜 불국사 석가탑이 최고의 탑이라는 것인지를, 교과서에 의해 이론적으로 알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와 온몸의 감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술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지만, 석굴암에 가서 비로소 최고의 불상을 보았다. 본존불은 이런저런 예술적인 과장과 장식을 말끔히 걷어내고 아름다운 비례와 능숙한 솜씨를 바탕으로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이었고, 신이 깃든 예술품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주었다. 그 앞에서 넋을 놓고 한참을 보았다.

불상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절을 찾아가야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집을 떠나 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 여럿 있다. 우리는 가끔 국립박물관 불상조각실에 가서 불상들을 만나곤 한다. 신라시대의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석불이 있고, 근엄하고 장대한 고려시대 철불도 있다.

그리고 금동으로 만든, 너무나 아름다운 2구의 반가사유상이 있다. 국보 78호와 국보 83호로 칭해지는 ‘일월식 삼산관 반가사유상’과 ‘삼산관 반가사유상’은 아주 특별한 불상이다. 보통 여느 불상과는 따로 모셔지는데, 그 자세며 표정이 너무 신비로워서 그 앞에 서면 시간을 잊게 되고 생각을 지운 채 무아지경으로 마주 서서 보게 된다.

반가사유상은 가부좌를 반만 튼 채 앉아서 생각을 하는 불상을 의미한다. 가부좌는 양쪽 발을 무릎에 포갠 채 앉는 자세인데, 부처님이 그 자세로 앉아서 늘 선정에 잠겨 있었다고 하는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자세이다. 반가부좌는 의자에 앉아서 왼쪽 발은 내려놓고,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를 이른다. 인도의 간다라 지방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출가를 앞두고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나타낸 것인데,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서 꽃을 피우게 된다.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도래인 진하승의 영혼을 모시는 신사
이번 가을 국립박물관에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불상을 모으고 시대별로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분류한 무척 반가운 전시가 있었다. ‘고대불교조각대전-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라는 타이틀의 전시였다. 때 아닌 안복을 누리며 불교 초기의 스투파 장식에서 시작해서 간다라, 마투라 시기를 거쳐 중국을 거쳐 한국에 오기까지의 불상의 변천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전시의 동선을 따라 가다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두 구의 반가사유상이다. 하루의 해가 옮겨가듯이 일정한 시간 동안 조명이 움직이는 방에 두 불상이 나란히 앉아있고, 이례적으로 촬영이 허용되었다. 사람들이 들어와 부산하게 촬영을 하고 구석구석을 바라본다. 그러나 어떤 소리, 어떤 동작도 빨려 들어가는 듯 그 안은 적막했다.

화려한 보관을 머리에 얹은 78호 반가사유상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골동품 수집가가 경상북도의 어느 사찰에서 입수한 것을 조선총독부가 사들여 총독부 박물관에 모셔놓았던 것이다. 단정한 보관을 머리에 얹은 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인 고미술상에게서 이왕가 박물관이 거금을 주고 구입해서 모시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높이는 금동불상치고는 큰 편으로 각각 82㎝와 93㎝다. 83호 불상이 조금 크고 세부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시대적으로는 6세기 후반, 7세기 전반, 5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분석되고 있으며, 모두 마지막 있었던 장소가 신라의 영토였던 관계로 대체적으로 신라의 불상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학계의 의견이 분분해서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은 고구려와 백제의 양식이라고 논증하고 있기도 하다. 

단정한 보관을 머리에 얹은 83호 반가사유상(왼쪽)은 일본인 고미술상에게서 이왕가 박물관이 거금을 주고 구입해서 모시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불상조각실에 전시돼 있다. 오른쪽은 한국의 반가사유상과 무척 닮았으나 미묘하게 다른 일본 국보 1호 목조 반가사유상.
# 일본 고류지에서 또 다른 목조 반가사유상을 만나다


국보 1호라고 할 때 지정된 번호의 숫자가 큰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왠지 1호라고 하면 그 주목도가 크고 상징성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국보 1호는 교토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 반가사유상이라고 한다.

그 불상은 신라에서 건너갔다는 설이 유력하다. 고류지에 가면 익숙한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이 절은 역사시간에 배웠던 아스카문화를 꽃피운 쇼토쿠 태자(성덕 태자)의 명을 받아 도래인 진하승(秦河勝·하다노 가와카쓰)이 건립했다고 한다.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으로 추정되는 진하승이 당시 일본의 재무장관 정도의 직책을 수행하던 중, 쇼토쿠 태자의 어머니인 스이코 여왕에게 신라의 진평왕이 목조 불상을 하나 보내주었다고 한다. 태자가 귀중한 불상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자, 진하승이 교토에 고류지의 전신인 호코지(蜂岡寺)를 지어서 보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불상은 지금도 고류지에 잘 모셔져 있다. 전후인 1945년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불상을 보고 인간 실존의 진정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이라 극찬했다고 한다.

지금은 교토의 중심부에서 조금 비껴난 외곽 같은 느낌이 나는 우즈마사로 목조 반가사유상을 보러가는 날은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7세기 무렵 진하승을 비롯한 신라 도래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일본에 새로운 문화를 열었던 무대가, 이제는 한적하고 약간은 퇴락한 느낌까지 드는 데다 비까지 내리니, 묘한 감흥이 일었다.

절은 여러 차례의 시련을 겪으며 창건 당시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고 하는데, 인왕문을 통해 들어가니 규모가 줄었다지만 넓은 경내가 나오고 건물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쇼토쿠 태자의 목상이 모셔져 있는 상궁왕원태자전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배알하듯 직각으로 서있는 진하승의 영혼을 모시는 작은 신사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더 들어가면 고류지의 보물들을 보관하는 집인 영보전(靈寶殿)이 나온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다양한 불상이 모셔져 있고 진하승 부부의 목각상도 있다. 그리고 한가운데 목조 반가사유상이 그윽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앉아 있다.

불상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 터라, 뒤에서 연신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는 머리가 희끗한 경비원의 눈을 의식하며 한참을 마주 대했다. 예전에 이 불상에 반한 젊은 대학생이 충동적으로 손가락을 잘라서 가버린 소동이 있은 후 굉장히 경비가 삼엄해졌다고 했다. 삼산관을 쓰고 아주 미소를 감춘 듯 편안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불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83호 반가사유상과 너무나 닮아있다. 머리 위에 얹은 보관도 같고 자세도 거의 같다. 다르다면 이 불상은 적송으로 만들어져 재료가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의 반가상은 뺨에서 손가락을 금세라도 뗄 듯한 모습인 데 반해, 일본의 반가상은 중지와 엄지를 맞추고 약지를 뺨에 댄 채 정지된 모습이다. 그리고 한국의 반가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오른쪽 발의 엄지발가락이 살짝 들려서 움직이는 듯한 데 반해, 일본의 반가상의 오른쪽 발은 정지되어 있다. 그리고 왼발이 밟고 있는 꽃잎이 한국의 반가상은 단엽인 데 반해 일본의 반가상은 복엽이고, 또한 한국의 반가상은 좌대에 앉아 있는 무릎이 좌대를 넘어 밖으로 삐져나가는 데 반해서 일본의 반가상은 좌대 안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다. 즉 한국의 반가사유상은 동적인 움직임이 강조된 데 비해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이라 두 나라 문화의 미묘하고도 뚜렷한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다.

삶과 죽음도 없으며 즐거움과 괴로움도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 불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말이나 글로는 ‘적멸’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처럼 정확하게 보여줄 수 없고, 그것을 읽거나 들어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불상과 마주하면 그 의미를 알게 되고 그 경지를 느끼게 된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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