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이색 전시회 영화와 음악을 전시장에서 만나는 것은 또 다른 특별한 경험이다. 진화하고 있는 시각예술의 현주소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프랑스 영화감독 필립 가렐(Philippe Garrel·67)을 조명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2월 28일까지 열린다. 가렐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포스트 누벨바그의 거장이다. 그의 작품 16편이 상영되고, 3편의 작품은 현대미술 형태로 재구성되어 소개된다. 아라리오뮤지엄 제주 탑동시네마 전시장에선 내년 1월 9일 한국 조각을 대표하는 요절한 천재 조각가 류인(1956∼1999)의 15주기를 기념한 바이올린 첼로 이중주 공연이 열린다. ‘사운드 오브 뮤지엄(Sound of Museum)’ 시리즈의 일환으로 열리는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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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필름을 고집하고 있는 프랑스 영화감독 필립 가렐 |
필름 영사기 생산이 중단된 현재까지도 35㎜ 필름 영화제작만을 고집하는 가렐은 16세에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발표하면서 영화 천재로 주목 받았다. 여러 편의 TV용 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그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궁핍한 환경에서 독특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다. 프랑스 68혁명이 일어난 해에 제작된 ‘폭로자’ ‘혁명의 순간’과 1970년대의 실험작품 ‘처절한 고독’까지 섬세한 호흡, 감정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최근작 ‘질투’ ‘인 더 섀도 오브 우먼’도 알 수 없는 공간에 버려진 듯한 인물들의 고독과 슬픔, 공허한 욕망이 점멸한다. 가장 고전적인 형태로 이미지의 현대적 담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기억 속에 흩어져 존재하는 순간들이 다시 영화로 촬영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빛에 바랜 순간들이 불연속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은 영화로 전시장에 설치된 35㎜ 영사기로 상영된다. 인물들의 대사는 별개의 사운드인 것처럼 35㎜ 화면 옆에 디지털 화면으로 재생된다. 이제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유물이 되어버린 35㎜ 영사기의 거친 소음과 빛의 입자가 거칠고 모호한 영화의 장면들을 더욱 몽환적으로 부각시킨다. 영사기와 필름을 감고 돌리는 영사기사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 필름 이미지의 물리적 성질을 관람객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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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가렐 영화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의 한 장면. |
아라리오뮤지엄의 류인 15주기 공연은 고인의 딸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류희윤이 참여한다는 점에서 각별함이 있다. 아버지를 위한 추모 연주라고 할 수 있다. 장르를 초월한 부녀의 예술적 성취를 한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다. 딸은 이번 공연을 위해 바흐의 샤콘을 직접 선곡했다. 뜨거운 예술혼을 불사른 아버지의 숙명적 슬픔을 엄숙한 3박자의 무곡 형식 안에서 진중하고 묵직한 멜로디로 재해석해 전하기 위해서다. 사실상 아버지 작품의 음악적 표현이다.
“아버지의 작품을 배경으로 헌정의 의미를 담은 연주를 하게 되어 무척 기쁘고 설렌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진정한 예술가의 사명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공연은 이스라엘 출신의 첼리스트 벤 시보렛이 함께 무대에 올라 아름다운 현의 선율에 깊이를 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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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는 생전의 류인 작가(왼쪽)와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류인의 딸 류희윤. |
행사를 기획한 아라리오뮤지엄 류정화 부디렉터는 “‘사운드 오브 뮤지엄’ 프로젝트는 순수미술, 음악, 디자인, 문학 등 다양한 동시대 예술 간 장르의 벽을 허물고 더 많은 관람객들에게 다채로운 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프로젝트”라며 “관람객들의 보다 쉽게 미술관에 접근해 창의적인 동시대 미술 작품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류인 전시는 제주 탑동시네마에서 내년 3월20일까지 이어진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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