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쓰시마번은 일찍부터 두 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교류가 단절되자 재정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후대의 한 학자는 “갓난아이에게서 젖을 뗀 것과 같다”고 할 정도였다. 쓰시마번의 입장에서는 교류 재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고, 조선에 여러 차례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이때 조선 정부는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낼 것, 왜란 와중에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잡아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두 가지 모두 해결이 쉽지 않자 ‘꼼수’를 택했다. 우선 살인범을 왕릉을 범한 주모자로 둔갑시켜 조선에 보냈다. 국서 문제는 아예 서류를 위조했다. 이에 대한 답서 역시 조선이 먼저 보낸 것처럼 위장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쨌든 1607년 통신사행이 성사되면서 국교는 재개되었고 쓰시마번은 목적을 달성했다. 이후 두 번의 통신사행에서도 국서 위조는 반복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최근 발간한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사진)은 당시 소송의 전말을 보여주는 기록을 국역한 책이다. 재단 측은 “국내 처음 번역되는 이 기록은 에도시대의 고사료에 역주를 달아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며 “17세기 초반 조일 외교 시스템이 정비되어 가는 과정의 이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강구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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