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하지만 왠지 편치 않아
‘응팔’의 짠한 감성을 자아내는 인정 넘치는 컴퓨터는 없을까 아직도 ‘응팔’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응팔’에는 맑은 물에 떨어뜨린 군청색 잉크 방울이 어쩔 줄 모르고 흐드러지게 퍼져나가는 듯한 진한 감성이 있다. 정환이, 택이, 덕선이 간의 머뭇거리고, 한없이 기다리고, 오래 간직하는 절제된 감성이 물씬 넘친다. 살짝 구겨진 빛바랜 사진이다. 아날로그다. 2016년 현재의 연애는 초스피드다. ‘우리 사귀자’ 하는 한 줄 카톡 메시지로 망설임 없이 만남이 시작되고 삭제 버튼 하나로 관계가 깨끗이 정리된다. 여운, 그런 거 없다. 편리하지만 편치 않다. 내게는 ‘챙챙’ 통기타 소리가 골을 뒤흔드는 디지털 EDM(Electronic Dance Music)보다 훨씬 편하다.
구글의 알파고(AlphaGo)가 지난해 10월 유럽 바둑 챔피언 판후이를 5대 0으로 이겼다. 이번에는 세계 최강 이세돌 9단과 3월에 대국을 한다. IBM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가 체스를 정복한 지 20여년 만에 이제 구글의 클라우드컴퓨터가 현존 최고의 바둑기사와 겨루려 한다. 교과서 여러 권을 수정해야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20년 전 학창 시절 동료하고 미래의 컴퓨터에 대해 긴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생전에 바둑으로 사람을 이기는 컴퓨터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정말 몰랐다. 초등 시절 보았던 어느 코미디 프로의 한 장면이다. 긴 백발, 흰 수염에 도포를 두른 신선 두 명이 있다. 이 양반들 빈 바둑판을 사이에 놓고 뚫어져라 본다. 장고 끝에 한 명이 빈 바둑판 정중앙에 돌을 바둑판이 쪼개질 듯 내려 놓는다. 순간 다른 신선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한참 정적이 흐른 후 짜증을 내며 돌을 던진다. 한 수 만에 불계승이다. TV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원유집 한양대 교수·컴퓨터공학 |
디지털 세상은 깔끔하다. 실수가 없고, 노이즈가 없고, 유격(틈)이 없다. 알파고의 포석, 깔끔하게 수정된 디지털 사진, 심지어 얼마 전 스콧데일 TPC 코스에서 홀인원을 기록한 골프로봇 엘드릭(LDRIC)의 스윙 등 디지털 세계에서는 잡음도, 오차도, 한 치의 실수도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은 본질적으로 아날로그다. 유격이 있고, 노이즈가 있어서 좋다. 흠잡을 곳 없는 논리보다 약간 어눌한 연설이 더 호소력 있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정교한 디지털 폰트보다 거칠고 투박한 인쇄기가 만든 책이 훨씬 읽기 편하다. 발광다이오드(LED) 전구의 빛 파장보다 필라멘트가 만들어내는 불빛이 왠지 은은하고 따뜻해서 좋다. 우리가 흔히 쓰는 ‘비인간적이다’라는 말, 오차 없이 감정 없이 논리만으로 전개되는 상황을 뜻한다. 느낌이 그리 좋지 않다. 사랑 고백을 머뭇거리게 하는 컴퓨터 알고리즘, ‘응팔’의 짠한 감성을 이해하고 생성할 수 있는 컴퓨터가 가능할까. 디지털의 편리함을 넘어서 아날로그의 편안함을 실현할 수 있는 컴퓨터가 우리가 지향하는 기술의 궁극적 형태다. 나는 아날로그가 좋다.
원유집 한양대 교수·컴퓨터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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