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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티끌에도 세계가 있다’는 화엄의 가르침 깃든 천년고찰

입력 : 2016-04-20 10:30:00 수정 : 2016-04-19 21: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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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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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 모든 것이 곧 하나이다

“하나 안에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안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곧 하나이다.(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이 말은 화엄경의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라고 한다. 경전들이 대부분 그렇듯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가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말이다. 마치 하늘의 그물처럼 온 세상을 다 덮으면서도 성긴 틈으로 의미가 빠져나간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부처라는 존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석가모니뿐만이 아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가 있다. 그리고 부처의 ‘말씀’을 담은 경전도 많이 있고, 그 종파도 무수히 많다. 그렇지만 그 말씀들과 그 부처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오로지 하나이고, 그것이 불교의 핵심사상이라고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몇천년 동안 여러 스승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이야기했지만 알아듣지 못한다.

그것은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일중일체 다중일’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 같다. 우리 삶 안에 진리가 있으며 진리는 우리의 삶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진리를 옆에 두고도 멀리 멀리 돌아간다는, 아마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스승들이 중생을 보며 참 답답해하고 있을 것이다.

‘화엄’은 살아 있는 것들과 그냥 존재하는 삼라만상과 그 존재를 둘러싸며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여서 우주 만물이 서로 원융(圓融)하여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제패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신라는 이 사상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고 화합하게 만들고자 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조계종이 주류이지만 예전에는 사뭇 달랐다. 지금의 종파는 선종이지만 신라시대에는 교종인 화엄종이 주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화엄종을 들여오고 널리 퍼뜨린 사람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의상이다. 의상은 당나라로 유학하여 화엄종을 배워와 우리나라에 퍼뜨렸다. 그는 당시의 왕인 문무왕의 후원을 받아 전국에 사찰을 지었고 후진을 양성했다.

의상대사가 화엄의 근본원리를 210자의 핵심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법성게이다. ‘법과 성은 원만하게 합쳐지며 둘이 아니다’(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로 시작되는 짧은 경문이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작은 티끌 안에도 세계가 들어 있다’(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라는 대목이다. 작은 것들, 큰 것들 할 것 없이 융화되고 어우러지며, 그리고 그 통일된 하나의 세상이 이루어진다.

왕의 전폭적인 지원 덕이었는지 의상은 전국에 무척 많은 절을 세웠다. 전국 곳곳에, 그것도 지금도 가기 힘든 산 깊은 오지에 차도 없고 장비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절을 그렇게 세웠는지 놀랍다. 그중 화엄종찰이라고 하는 영주 부석사가 있다. 그 절은 의상이 소백산에 자리를 잡았고 그의 제자들이 몇 대에 걸쳐 완성한 우리나라 가람 배치의 교과서라고 부르는 절이다. 진입의 구성이나 당우의 생김새 등이 빼어나며 무량수전에 앞에서 소백산을 내려다보는 경치가 압권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경사지를 정리하며 생긴 석단을 받치고 있는 석축이 대단하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조화롭게 놓인 그 석축은 잘 다듬은 돌들이 아니라 주변에 널려 있는 돌들을 솜씨 있게 쌓아놓은 듯하다. 이를테면 작위를 감춘 작위라 볼 수 있는데, 그 크고 작고 다양한 석질의 돌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화음은 마치 천상에서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 같다. 그리고 그것은 의상이 이야기하는 화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진리는 그렇게 석축에 숨어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폭이 60m이고 깊이가 약 9m 정도 되는 긴 건물로, 가운데 마당을 두고 나란히 놓여 있다. 앞에 있는 건물이 수다라장이고 뒤에 있는 건물은 법보전이다.
문화재청 제공


# 굳건한 기상이 넘치는 해인사 예불을 듣다

요즘이야 그럴 일이 별로 없지만, 예전에는 절이나 오래된 민가에 건축답사를 가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왜 왔느냐며 의아해하곤 했다. 많이 알려진 곳에서는 “혹시 사학과 학생인가요?” 하고 묻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팔자 좋게 산천경계 유람 다니는 한량 취급을 당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를 넘어서며 역사적인 유적이나 고건축 답사가 온 국민이 같이 즐길 수 있는 ‘문화 레저’로 승격되며 그런 시선이 많이 줄긴 했다.

살림집이야 아무래도 너무 이른 시간이나 늦은 시간에 가는 일은 없지만, 절은 새벽 4시 아니면 저녁 6시 무렵 예불시간에 맞추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새벽잠을 설치며 어두운 산길을 기어올라 열심히 다녔던 것은, 새벽이나 저녁에 절에서 듣는 예불이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장엄하고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그 느낌을 알고 나면 자꾸 가게 된다. 나의 경험으로 이야기할 때 최고의 예불은 순천 송광사의 예불이었고 청도 운문사의 예불이었다. 모두 스님이 많은 절이었는데, 구름처럼 모였다 흐트러지며 한목소리로 읊는 염불과 의례는 정말 장관이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예불은 합천 해인사에서 보았다.

대적광전
보통의 예불은 마치 궁중에서 펼쳐지는 정악처럼 느릿하면서 기품이 있고, 그 안에 큰 리듬이 훨훨 날아다닌다. 그런데 해인사의 예불은 아주 달랐다.

한 10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아는 분과 같이 해인사에 간 적이 있다. 그분은 나보다 한참 선배인 한국 전통 건축을 연구하는 학자였는데, 대구에서 일을 보고 나서 마침 해인사에 자문을 해줄 일이 있어서 가야 하니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저녁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하루 자야 했다.

나는 답사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게 다녔노라 자부했지만, 답사하는 건물에서 잠을 자거나 밥을 얻어먹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아주 혹해서 두 말 않고 따라나섰다. 도착하니 어떤 젊은 스님이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었고, 요사채 한 구석에 있는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숱하게 다녔던 절이었지만 그곳에서 밤을 보내게 된 것은 처음이었고, 더군다나 해인사 예불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굉장한 기대 속에 누워서 대충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새벽 예불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적광전으로 갔다. 역시 큰 절이라 새벽예불에 참여하는 스님도 많아 법당이 가득 차 있었다.

해인사 예불은 조금 특이했다. 내가 그동안 보았던 여느 절과 다르게, 무척 빠르고 씩씩하게 마치 군인들이 구보하며 군가를 부르듯이 진행되었다. 물론 절마다 혹은 문중마다 분위기가 좀 다르고 예법도 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해인사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왜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낸 결론은 그곳이 아마 팔만대장경을 지키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의 스님들의 기상이 남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절도와 용맹 속에서 나무판에 새긴 팔만대장경이 1000년이 다 되도록 살아남아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계단을 올라서면 작은 문이 나오는데, 해인사라는 사찰의 영역에서도 아주 특별한 장소이다.
# 화엄의 정신이 깃든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는 법보사찰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통도사는 불보사찰이고, 국사가 16명이 나오고 정혜결사 등을 통해 불교의 바른 전통을 세우는 데 이바지한 송광사는 승보사찰,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어 해인사는 법보사찰이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인 802년 의상대사의 손자뻘 제자인 순응과 이정이란 승려가 창건한 절이다. 이름도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라는 구절에서 따왔으니 화엄의 전통이 계승된 절이라 할 수 있다. 해인사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해인사의 제일 안쪽 높은 언덕에 있다.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뒤로 가파른 계단이 보이고, 그 계단을 올라서면 작은 문이 나온다. 해인사라는 사찰의 영역에서도 아주 특별한 장소이며,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절의 결이 갑자기 옆으로 넓어지는 결로 바뀌는 곳이다.

1500여종의 경전이 8만1258개의 판에 5200만자의 글씨로 새겨져 보관되어 있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면 두 개의 건물로 바로 진입하게 된다. 당연히 공간은 옆으로 길고 앞으로는 얕아진다. 그 문으로 들어서면 덩치가 큰 건물이 바로 앞으로 바짝 다가서 있다. 그곳이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폭이 60m이고 깊이가 약 9m 정도 되는 긴 건물인데 가운데 긴 마당을 두고 나란히 놓여 있다. 앞에 있는 건물이 수다라장이고 뒤에 있는 건물은 법보전이다. 그 안에는 1500여종의 경전이 8만1258개의 판에 5200만자의 글씨로 새겨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연간 기온차가 무척 크고 습도의 차이도 무척 큰 우리나라의 가혹한 기후에서 어떤 기계적인 장치의 도움도 없이 천년의 세월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켜내고 있는 대단한 집이다. 그 비결은 과학적인 공간구성에 있다고 한다. 우선 건물의 형태가 바람이 잘 통하는 얇은 집이고, 집이 앉은 땅이 높고 건물과 건물 사이가 좁아 바람의 유속이 빠르다. 

장경판전 수다라장에서 대문채를 바라본 모습.
그리고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창의 크기가 달라서 일종의 굴뚝효과를 만든다. 남쪽과 북쪽 면에 위아래 두 개의 창이 쌍으로 달려 있는데, 남쪽은 아래가 크고 위가 작고, 북쪽은 그 반대이다. 그래서 바람은 남쪽 아래 창으로 들어오고 내부의 경판을 쌓아놓은 서가를 거쳐서 북쪽 작은 창을 통해 빠져나간다.

그리고 바닥은 숯과 소금과 횟가루를 모래와 찰흙에 섞어놓은 흙으로 다져놓아 방부와 방충 그리고 습도조절을 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목재로 지은 건축물의 치명적인 약점인 화재에 대한 대비를 위해, 해인사 경내의 다른 전각들과 높이 차이가 많이 나는 기단 위에 놓아서, 화재 시에도 불이 번지지 않도록 떨어뜨려 두었다. 실제로 그동안 해인사에 몇 번의 큰 화재가 있었지만 장경판전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수다라장 살창
해인사 장경판전은 그렇게 아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계획되고 구현된 곳이다. 높은 입지와 바람의 흐름을 조절하는 공간의 배치는 이 건물이 완벽하게 본연의 기능을 다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같이 따르는 법이다. 그 단점은 건물이 가로로 길기 때문에 깊이가 얕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건물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이 건물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말씀을 보관하는 집이며 해인사에서도 가장 위계가 높은 곳이다. 계단을 올라 한눈에 그 끝이 보이며 실제로도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끝에 도달하는 입지는 분명히 큰 약점이다.

그래서 이곳을 설계한 사람은 공간에 깊이를 주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했다. 깊이가 얕아 짧은 진입공간에 여러 개의 켜를 만들어 심리적 깊이를 만든 것이다. 계단을 올라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수다라장을 거쳐 법보전까지 가는 중간에 팔만대장경, 장경각, 보안당, 법보전 등 여러 개의 현판이 차례로 보인다. 그리고 마치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여러 개의 문들이 중첩되고 기둥과 보가 중첩되어 한없이 수렴되는 무한히 깊은 공간과 같은 시각적인 착각을 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무한히 늘어나고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안에 하나가 있다”는 말의 의미가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정신과 몸에 새겨진다. 그렇게 그곳은 건축을 통해 읽는 가장 효과적이며 가장 감동적인 경전이 된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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