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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 vs 평양… 한무제가 세운 낙랑군 위치 놓고 열띤 토론

입력 : 2016-08-21 21:40:33 수정 : 2016-08-21 21: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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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한반도설’ 논쟁의 중심
중국 요서 답사토론회 가보니
한 달여 전 중국 요서지역 답사·현장토론회에 참여해 달라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제안을 받았을 때 두 가지를 떠올렸다. “토론은 얼마나 치열할까?”, “합의야 어렵겠지만 다음을 기약할 만한 계기는 만들 수 있을까?” 답사지역, 답사단의 구성 때문이었다. 답사지인 영평부성, 갈석산, 갈석궁터 등은 한국 고대사의 쟁점 중 하나인 ‘한사군 한반도설’(고조선이 무너지고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 등 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설)의 무대가 되는 지역, 유적이다. 이 설은 중국이 고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학계는 물론 중국의 동북공정이 본격화되면서 정치권까지 가세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안이다. 답사단은 그 논쟁을 주도하고 있는 강단, 재야의 대표적인 학자들로 구성됐다. 

우하량유적의 하나인 츠펑의 삼좌점석성에서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공석구 한밭대 교수, 정인성 영남대 교수,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 소장, 이종찬 우당장학회 이사장(왼쪽부터) 등 답사 참가자들이 고조선 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논쟁은 원없이 뜨거웠다. 첫날 18일 답사지는 허베이성 노룡현, 창려현의 영평부성과 갈석산. 한사군 한반도설을 식민사관의 잔재로 여기는 비주류에서는 이 일대에 낙랑이 있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에서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이 시작된다”는 내용을 담은 ‘태강지리지’, ‘진서’ 등 중국 역사서들이 근거다. 이 문구는 갈석산 인근이 진나라 영역의 동쪽 끝이자 고조선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만리장성을 한반도 북부로까지 우겨넣는 중국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이기도 하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갈석산은 진시황, 한무제, 태무제(조조) 등 아홉 명의 황제가 제국의 동쪽 끝이란 의미로 올랐던 곳”이라며 “낙랑군은 명·청대 ‘영평부’였던 지금의 노룡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밭대 공석구 교수는 낙랑의 위치를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비정한 종래의 견해를 견지하며 태강지리지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공 교수는 태강지리지가 서기전 108년 평양 부근에 설치되었던 낙랑이 400여 년이 지난 313년 요서 지역으로 옮겨갔을 때의 상황을 후대에 정리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낙랑군은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갔고, 갈석산 인근에 설치된 시기는 대체로 313년 이후의 일로 생각한다”며 “이 사료를 가지고 (한무제가 처음 설치한 평양의) 낙랑군 위치와 연결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강조했다. 

재야 사학계가 낙랑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영평부성의 모습.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이틀째도 ‘갈석 논쟁’은 이어졌다. 무대는 ‘갈석궁 유적’. 1980년대 초반 발굴된 곳으로 진시황이 임시로 머물렀던 행궁(行宮) 유적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이 갈석산보다 훨씬 동쪽에 있다는 점은 진나라의 영역이 동쪽 끝이 갈석산이라는 재야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보여준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진나라 궁궐에서 쓰인 것과 비슷한 부재와 방식으로 만든 구조물이 확인됐다. (재야의 주장처럼 이 일대가 고조선 영역이었다면) 고조선 관련 유물이 나올 만도 한데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역사연구소 문성재 책임연구원은 “조조가 읊은 시에는 ‘등(登)갈석’(갈석을 오르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곳은 평지라 ‘오른다’는 표현에 부합하는 지리적 특성이 없다”고 맞섰다.

셋째 날, 석기·청동기 시대의 홍산유적·하가점유적을 두고도 “고조선 문화의 시원”이라는 재야의 견해와 “그렇게 볼 여지는 있으나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강단의 인식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참가자들은 답사지에서마다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유적지에서 꼬박 사흘간을 붙어다니며 의견을 나누다 보니 그간 국내에서 개최된 어떤 토론회보다 훨씬 구체적이었다. 매일 저녁 숙소에서 관련 사료, 고고학 성과 등을 정리해 벌인 토론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단, 재야 학자들의 동행 답사를 처음으로 기획한 재단의 의도는 이런 점에서 충족된 듯 보였다. 재단 김호섭 이사장은 “고대사 논쟁의 주요 무대가 중국인 만큼 현장을 찾아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나눌 기회를 만든 것”이라며 “논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흘간의 답사는 고대사의 쟁점, 특히 낙랑군 위치 비정 문제에 대한 강단, 재야 학계가 시각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아주 멀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따금 표출된 감정 섞인 반응은 서로를 향한 평소의 불신을 드러낸 것이었다. 재야 학자들은 “불리한 사료는 위조로 모는 한국 주류 사학계의 안 좋은 습관”을 지적했고, 강단 학자들은 “팩트를 팩트로만 보는 게 아니라 유불리를 따지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운동을 하자는 것”이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사실 고조선의 강역, 낙랑군 위치 문제는 조선후기 역사지리학이 태동한 이래 학자들이 줄기차게 논쟁을 벌였던 사안이라는 점에서 짧은 답사로 의견을 하나로 모을 주제가 아니다. 이런 현실을 놓고 보면 양측이 현장에서 학문적인 진검승부를 벌인 자체에서 답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공 교수는 “낙랑군을 평양에 비정해도 만리장성이 한반도 서북부까지 들어온다는 중국의 주장에 동의하는 한국 학자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인식을 같이 한 것이 아닌가 싶다”며 “이런 문제를 향후에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한다면 의견차는 조금씩 좁혀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소장은 “중국에서조차 낙랑군을 요서에 있었다고 하는데 최소한 이런 부분은 받아들인 상태에서 논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톈진·츠펑·차오양=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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