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박사가 된 김인후는 세자의 시강(侍講)을 맡는다. 후에 인종이 된 세자는 어느 날 직접 붓을 들어 묵죽도를 그려 스승에게 주었고, 스승인 김인후는 신하로서 절의를 지키겠다는 뜻이 담긴 시를 쓴다.
‘뿌리 가지 마디 잎 모두가 정밀하고 은미하며(根枝節葉盡精微), 돌을 벗삼은 굳은 정신 화폭 안에 들어있네(石友精神在範圍). 비로소 성인의 정신이 조화롭다는 것을 알았으니(始覺聖神?造化), 세상과 한 덩어리 되어 서로 어김없으리라(一團天地不能違)’
제자와 스승, 세자와 신하의 지위를 떠나, 대나무와 바위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서로 믿고 존경한다는 마음을 주고받은 것이다. 김인후는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믿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졌음을 알고 낙향해 여생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후대 임금에게도 전해지는데 정조는 선대 임금과 신하의 이야기에 감동한 나머지 ‘경장각’이라는 이름을 내려 이 묵죽도를 보관토록 한다.
사적으로 지정된 필암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정조의 어필을 비롯하여 송시열, 송준길, 윤봉구 등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쓴 현판이 남아 있다. 건축은 직접 자로 재어 척도로 분석하지만, 선비의 학문과 정신은 남겨진 글과 그림을 통해서 이해가 깊어진다.
조상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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