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건국절 공론화 추진
정치와 역사, 일정한 거리 둬야
역사전쟁 벌일 때가 아니다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태평성대인 ‘정관의 치(治)’를 이룬 당 태종은 “옛 역사를 거울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송나라 때 사마광이 지은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감(鑑)’이 거울을 뜻한다. 역사는 ‘정치의 거울’인 것이다. 역사를 거울 삼으려면 정치와 역사가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 조선 왕조는 사관이 왕의 언행을 기록했다가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했는데, 왕조차도 사관이 쓴 사초를 볼 수 없었다. 정치논리가 역사를 지배하는 것을 막으려는 장치다.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이라고 했다. ‘건국 68주년’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보는 보수진영 일각의 주장을 받아들인 표현이다. 이에 대해 광복회는 “3·1 독립운동 직후 대한민국 수립을 임시정부가 선포하고, 부단한 독립운동을 통해 광복을 되찾았으며, 1948년 정식 정부가 수립돼 그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게 우리 역사의 정설”이라고 반박했다. 역사학자들도 “독립운동과 헌법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박완규 논설위원 |
나는 1960년대 말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개천절이 나라를 세운 날이고 8·15는 광복절이자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라고 배웠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이룬 빛나는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8·15 건국절’ 얘기를 들으니 역사인식에 혼란이 생긴다. 우리나라 헌법을 들여다봤다. 1948년 제헌헌법 전문에는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돼 있다. 그해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연설문의 말미에는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적혀 있다. 임시정부가 세워진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뜻이다. 당시 주요 신문들도 기사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한 나라의 역사는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나라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만 의미와 객관성을 지니게 된다”고 했다. 정권에 따라 역사 해석과 용어를 바꿔 나가면 그 나라의 역사는 누더기가 되고 만다.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유일한 참된 역사는 상호 협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보편적인 역사’”라며 “과거에 대한 무지는 현재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행동에까지 위험한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
집권세력은 온 나라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의제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낸 뒤에 결론이 도출되면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게 기본 책무다. 건국절 논란을 지켜보면 집권세력의 의제 설정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래서 묻는다. 왜 하필이면 지금 건국절을 얘기하는가.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지금은 정치권이 나서서 역사전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 학계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질 때까지는 정부수립일을 알차게 기념하는 게 백번 낫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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