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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생의 바비예 레토를 맞았다고 환호하던 그가 말 그대로 짧고 아름다운 러시아의 간절기 ‘바비예 레토(Babye Ieto)’처럼 사랑을 끝냈다고 침울하게 전했다. 잠시 들떴지만 그건 역시 지나가는 계절의 바람이 슬쩍 흔든 것이라고 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가슴 아픈 기기묘묘한 이별이 많은데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그렇게 애잔하게 헤어질 수 있다는 건 그나마 축복이라고 위로했다. 옷소매 적시며 작별하는 몌별(袂別)도 있다. 서로의 의지나 합의가 아니라 상황이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가슴 아픈 이별, 옷소매가 축축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며 차마 떠나보내야 하는 그런 이별은 사실 지켜보는 이에게만 낭만적일 따름이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이별이란 떠나는 자나 남겨지는 이 모두에게 고문이요 폭력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다시 보기는 하는 모양이다.

구월이 깊어가는 이 즈음이면 라디오에서 자주 들려오는 가곡 ‘이별의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은 제법 알려진 편이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로 이어지는 이 가사에는 박목월 시인의 아픔이 눅진하게 배어들었다. 삼십대 후반 가정이 있는 목월에게 E여대 국문과 학생이던 H양이 뜨거운 구애를 했고 결국 시인은 그네와 함께 제주도로 떠나가 이승의 피안에 초막을 지었다. 그들을 찾아와 생활비 봉투를 내밀고 조용히 돌아서던 목월의 부인 뒤에서 H양은 통곡을 했고 그해 가을이 다 저물 무렵 결국 목월은 서울로 돌아왔다. 30여년 이별의 세월이 흐른 뒤 목월은 이승을 떠나기 얼마 전 늙은 H양의 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고, 그날 밤 이렇게 썼다.

“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방문’)

꿈결의 회랑에서 실루엣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이들이 내는 길게 울리는 발소리, 그것이 사람의 인연이라고 목월은 보았다. 지나고 나면 꿈으로도 남지 않는 인연이 한둘일까. 그나마 오래오래 그 꿈을 기억하고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다시 기억의 회랑을 더듬을 수 있는 인연이라면, 아무리 짧았던 만남이라도 그건 축복이라고, 야윈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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