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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작은 집서 모자람 없는 삶… 집은 '주인의 성품' 닮는다

입력 : 2016-09-30 21:20:00 수정 : 2016-09-30 21: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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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충재와 청암정
르코르뷔지에의 ‘Cabanon’은 최소 크기의 공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조립식 오두막으로 가로 3.66m×세로 3.66m×높이 2.66m로 면적은 13.4㎡(4평)밖에 안된다.
# 오두막, 누구나 마음속에 그리는 집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필생의 집이 있다. 그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뛰어넘는다. 현대건축의 기틀을 만들었던 프랑스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만년에 바닷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쉬면서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사실 르코르뷔지에의 건물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혹은 그의 말년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은 며칠 전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다 얻어걸린 문화교양 케이블 채널에서 그에 대한 다큐를 잠깐 봐서 알게 된 것이다. 어떤 이유로 그곳으로 갔는지,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끄트머리만 조금 보게 됐다.

바다에 인접한 경치가 무척 아름다운 언덕에 오두막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야외에서 이웃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70대 후반의 르코르뷔지에의 사진이 흘러갔다. 어떤 꼬마와 그 가족과 둘러앉아 햇살이 가득한 정원의 테이블에서 환담하는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과는 무척 달라 어색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처럼 바다로 수영을 가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그의 나이 일흔일곱이었다”는 내레이션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작은 집을 짓고 바다를 보며 종이에 휘갈긴 스케치를 벽에 덕지덕지 붙여놓고 수영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르코르뷔지에. 무언가 탈속한 신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많은 건물을 설계하였고, 그가 설계한 건물 하나하나가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100년이 넘게 추앙받고 있는 위대한 건축가가 마지막으로 지은 집이 자신을 위한 허름한 오두막이라니. 그건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몸짓이었을까.

나는 리모컨을 들고 끊임없이 농담을 던지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푸른 잔디 위에서 선수들이 미친 듯이 공을 차는 프리미어 축구 중계 사이에서 갈등하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돌이켜보면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공간의 역사 혹은 건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상과 사건이 인간이 만든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숲에서 사냥하고, 들에서 일하고, 광장에서 정치를 하고…. 약간 과장해서 생각하면 인간에게 있어 제대로 된 유일한 건축은 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건축이란 결국 인간이 담기는 것이고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물론 크게 보면 자연에 기대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인간이 자연과 떨어져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곳이다.

르코르뷔지에의 작은 조립식 오두막.
르코르뷔지에의 작은 집은 8~9월 여름 두 달을 무더위 속에서 보내는 1951∼52년 사이에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나무가 우거진 절벽에 지어졌다. 최소 크기의 공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조립식 오두막으로 가로 3.66m×세로 3.66m×높이 2.66m 규모이니 13.4㎡(4평) 남짓 된다. 공교롭게도 이 크기는 헨리 데이비스 소로가 지었던 월든 호숫가의 집 크기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이 거주하는 데 필요한 최소면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집은 르코르뷔지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지은 유일한 집으로, 마침 친구가 근처에서 레스토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부엌을 아예 설계하지 않았고, 먹고 자고 기도하기 위해 지어진 수도사의 거주공간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의 다른 몇몇 작품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집의 이름인 ‘Cabanon’은 오두막이라는 의미로,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기원, 즉 아주 기본적인 것만을 갖춘 원초적인 오두막이자 그가 건축에 대하여 꿈꾸고 그리고 생각했던 장소로서의 작은 집을 만들었다.

# 봉화, 기억과 기록의 땅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 말년에 평생 얻은 것들을 정리하고 몸만 겨우 들일 만한 작은 집에 머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이황의 도산서당, 송시열의 남간정사, 조식의 산천재 등 소위 ‘삼간지제’(선비의 집은 세 칸을 넘지 않아야 한다)의 정신을 남긴 집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충재(沖齋)는 조선 중종 때에 살았던 권벌(權橃·1478~1548)의 호이며, 그가 살며 공부하던 서재의 이름이다. 충재가 자리 잡은 닭실마을은 경북 봉화에 있다. 이 마을은 4대 길지니 8대 명당이니 혹은 금계포란형의 지세라는 둥 이런저런 수식이 잔뜩 붙어 있는 곳이다. 혹자는 전쟁도 비껴가고 일제의 수탈도 비껴간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눈이 어두워 그런 지세를 읽기는 힘들지만, 완만한 산봉우리가 포근하게 동네를 감싸고 있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부는 살기 좋은 곳임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안동 권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닭실마을에 권씨 집안이 자리 잡게 된 것은 권벌이 집을 지으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는 안동 도촌에서 나고 자랐으며, 중종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예조 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기묘사화로 파직되자 낙향하여 15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그가 파직되기 1년 전에 훈구파와 신진 사림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피해 자원하여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임지로 갈 때 보아두었던 터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학자들, 특히 벼슬에 나선 양반들은 정치적인 입장 차이에 따라 시시때때로 지위가 급변하곤 했다. 어제까지 호의호식하던 판서가 하루아침에 죄를 받고 제주나 거제 같은 섬으로 유배를 가고 가족은 관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다.

당시의 형벌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귀양과 유배는 조금 의미가 다른 것이 귀양은 귀향(歸鄕)에서 유래된 말로,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 것, 즉 방축향리(放逐鄕里)로 유배보다는 한 단계 가벼운 처벌이었다.

반면 유배(流配)는 2천리, 2천5백리, 3천리 등 먼 곳으로 보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벌로 장 1백대를 먼저 시행했기 때문에 가기도 전에 죽는 사람도 있었고, 그 기준이 중국법을 적용한 것인데 우리나라가 남단 끝까지 거리가 1천리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숫자를 채우려고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화를 입기 전 아예 정치에 거리를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게 되는데, 그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아예 세속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학문을 닦기도 하고 가세를 늘리기도 하고 자신을 바로세우기도 했다.

권벌이 터를 잡은 봉화는 경북의 가장 북쪽에 있어 산이 깊고 숲이 많지만, 삼한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특히 풍수상의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 중 한 곳이라고 하여 1606년(선조 39) 봉화 각화사에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건립하여 왕조실록을 수호하게 했다. 태백산사고는 조선시대 외사고 중 하나로,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을 재발간하여 춘추관 및 외사고(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등)에 보존할 때 만들어졌다. 이후 전란에 다른 사고가 불탔을 때도 잘 보존되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실록이 바로 태백산본을 근거로 한 것이다.

봉화의 풍수까지 깊이 알 수는 없지만 청암정이 지금 남아 있는 정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하고 충재고택에 보관된 서적 중 보물로 지정된 것이 4점이나 있는 것으로 볼 때 크게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청암정은 커다란 거북바위 위에 높다랗게 앉아 있고 충재는 마치 정자를 올려다보듯 수더분하고 고즈넉하게 마주보고 있다.
# 화해와 조화를 꿈꾼 충재와 청암정

충재고택은 ‘ㅁ’자로 구성된 안채와 그 왼쪽(서쪽)으로 사당이 넓게 자리 잡고 있고, 또 그 왼쪽으로 담을 두른 일곽에 두 채의 건물이 보인다. 세 군데의 영역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그 구성이 조금은 느슨해 보이기도 하고 각자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무척 특이하다. 물론 그런 구성은 세월이 지나며 집을 고치고 다시 짓고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배치일 수도 있고 혹은 주인의 독특한 개념이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가장 왼쪽의 영역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바로 청암정과 충재인데, 하나는 정자이고 하나는 서재이다. 청암정은 커다란 거북바위 위에 높다랗게 앉아 있고 충재는 마치 정자를 올려다보듯 수더분하고 고즈넉하게 마주보고 있다.

T자형 평면에 단청까지 되어 있어 높고 화려한 청암정과 무덤덤한 일자형 세 칸짜리 박공지붕의 충재는 무척 대조적이다. 마치 그 영역은 청암정을 위해 지어놓은 듯해서, 충재의 존재는 눈에 띄지 않는다.

“1526년 봄, 중허(권벌의 호)가 암정을 건립하고 이듬해 봄에 마루를 깔았다.(嘉靖丙戌春巖亭成 明年春安枺樓 主人仲虛)”

1721년 청암정을 보수공사 할 때 권벌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목편이 발견되면서 청암정과 충재가 지어진 시기를 알게 되었다. 청암정의 원래 이름이 암정이었다는 사실과 권벌이 이 동네에 자리를 잡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이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아쉽게도 건물을 지을 때의 의도와 개념에 대한 더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충재는 충재 권벌의 개인 서재이며 한서당(寒栖堂)이라고도 부른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암정에 비해 소박하고 아담하다. 온돌이 없고 마루만 설치되어 있는 청암정과는 달리 충재는 크지는 않지만 온돌방이 있다. 여기서 권벌은 외부에서 찾아오는 많은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양성했다고 전해진다.

세 칸 중 가운데 칸인 어칸과 좌측 협칸은 방이고 우측 협칸은 대청이다. 폭이 좁은 좌측 방 끝에 툇간을 두어 아래에는 함실아궁이, 위로는 다락을 설치했다. 창호의 경우 방에 정면과 배면으로 나 있는데 정면은 세살문이고 어칸은 두 짝 미닫이이다. 뒷면의 문은 청판이 있는 만살문이며, 대청과 방 사이에는 세살미닫이문이 있고 청암정 방향으로 판문이 설치되어 2면은 개방이 되어 있는 형태이다.

오른쪽 마루 칸은 정면은 트여 있고 청암정과 마주보고 있는 뒷면은 널로 짠 바라지창이 달려 있다. 그래서 정면은 전면이 개방된 우측 마루칸과 6분의 1정도 열린 좌측 협칸이 열리고 닫힘의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바라지창과 널판으로 막아 놓은 뒷면은 청암정에서 바라볼 때 하나의 벽처럼 구성해 놓았다.

맞배지붕에 민도리집인 이 건물은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으며, 서재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소박한 건물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담백한 성품의 주인이 공부를 하다 한숨 돌릴 때 거북바위 위에 수려하게 앉은 청암정을 바라보았을 풍경이 절로 그려진다.

큰 학자이자 꽤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던 권벌은 훈구와 사림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기도 했는데, 말년에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인해 삭주에 유배 가서 생을 마감하여 실록에 졸기(卒記) 한줄 남아 있지 않다.

강직하면서도 화해와 조화를 꿈꾸었던 충재 권벌의 삶의 태도는 충재와 청암정, 두 건물이 만들어내는 풍경에 그대로 녹아들어 남아 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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