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영화 ‘아리랑’ 나운규, 꿈 키웠던 명동학교

관련이슈 류영현기자의 역사항쟁지 다시보기

입력 : 2016-10-06 21:56:07 수정 : 2016-10-06 21:56:0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일제강점기인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영화 ‘아리랑’이 처음 상영됐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면서 2년6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상영됐다. 영화의 주제곡 ‘신아리랑’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영화 아리랑을 만든 감독은 춘사 나운규(羅雲奎·1902~1937) 선생. 그는 독립운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선생은 영화를 만들 때에도 우리 민족의 나라 잃은 설움을 영화 속에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아리랑’이 대표적이다. ‘아리랑’의 주인공 영진은 대학을 다니다 3·1운동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자가 된다.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기호가 여동생을 덮치려고 하자 낫을 휘두르게 된다. 일본 순경에게 붙잡힌 영진은 수갑을 찬 채 끌려가는데, 이때 주제가 ‘아리랑’이 흐르며 영화가 끝난다. 주인공 영진에게서 나라를 잃고 정처 없이 헤매는 우리 민족의 처지를 보게 된다.


춘사 나운규(작은 사진) 선생이 다녔던 지린성 황룽현에 있는 명동학교. 이곳은 1910년 3월 개교 이래 독립군 양성 기지이자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독립기념관 제공
선생은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의 명동중학에서 수학했다. 명동중학은 독립군 양성기지이자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시인 윤동주가 선생의 후배인 셈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을 때에는 명동중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회령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선생은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당했다. 연해주로 건너가 러시아 용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만세운동을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선생은 출소 후 1924년 1월 극단 예림회에 가입해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부산 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했다.

선생은 ‘심청전’의 심봉사 역을 맡는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해 주목받았다. 그리고 1926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해 일약 조선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이어 ‘풍운아’ ‘잘 있거라’ ‘사랑을 찾아서’ 등 여러 작품을 제작했다. 독립군 경험을 토대로 제작한 ‘두만강을 건너서’는 일제의 검열 때문에 제목을 ‘사랑을 찾아서’로 바꿔 개봉해야 했다.

1931년 이후 제작하는 영화마다 흥행에 실패한 가운데 이전에 앓던 폐병이 재발했다. 선생은 병중에도 ‘오몽녀’를 제작하는 등 창작혼을 불태웠지만 병이 악화돼 결국 1937년 8월 9일 향년 36세로 숨을 거뒀다.

류영현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