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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바람과 햇볕 벗 삼아 머물고 싶은 '제주의 집'

입력 : 2016-10-14 20:33:16 수정 : 2016-10-14 20: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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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마을 초가집 옛집 원형 보여줘…마당을 둘러싼 공간들 닫혀 있어
육지 민가 대부분 디귿자형과 대조…11자 배치 두채가 남향으로 공존
# 제주도 방언처럼 낯선 마을과 집들

남들은 신혼여행이다, 수학여행이다 해서 제주도에 많이들 가던데 내게는 이상하게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학생시절 몇 번 기회가 있긴 했지만 그때마다 일이 생기거나 상황이 나빠서 못 갔다. 신혼여행지를 경주와 속초로 잡는 바람에 또 못 갔다. 이러다 평생 제주도에 가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이나 이국적인 풍광에 대한 소문을 들으며 아주 멀리 있는 이상향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분이 제주도 서귀포에 집을 짓고 싶어 몇 년 전 땅을 샀노라며 찾아왔다. 만나서 제주도에 대한 찬양을 한 시간 정도 들으니, 마치 코발트색이 듬뿍 칠해진 그림을 생생하게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제주도에 가보기로 했다.

비행기와 렌터카를 예약하고 한 시간 날아서 제주 공항에 도착하니, 듣던 대로 코발트색 하늘이 쨍하게 반겨주었다. 아주 맑은 가을날이었는데 구름이 한 점도 없었고 하늘이 아득하게 높았다. 제주도 땅에 처음 발을 딛고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운전을 하면서 따라가니, 그 땅은 성읍민속마을 근처에 있는 곳이었다. 검은 돌로 포위된 담장이 한적한 동네를 굼실굼실 기어가고 있었고, 주변엔 생전 처음 보는 감귤 밭이 흔하게 보였다. 
제주도의 살림집 원형을 볼 수 있는 성읍마을. 새끼줄로 포박해놓은 초가지붕이 덮이고 황토에 검은 돌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집들이 여러 채 모여 있었다.

집을 짓겠다는 땅을 둘러보고 성읍마을로 제주도의 옛집을 보러 갔다. 제주도의 살림집 원형을 볼 수 있는 그곳에는 새끼줄로 포박해놓은 초가지붕이 덮이고 황토에 검은 돌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집들이 여러 채 모여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마당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있었는데, 따뜻한 남쪽 지방이라 개방적인 구성일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들은 닫혀 있는 구성이었다.

그리고 집 앞으로는 요즘의 주차장 셔터처럼 전면을 가릴 수 있는 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짚이나 싸리 등 가벼운 재료로 엮은 가리개였는데 위로 들어 올리고 바지랑대로 걸쳐놓으면 집 앞을 가리는 긴 처마처럼 되는 것이었다. 집 옆으로 붙어있는 부엌과 아궁이가 지붕아래에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도 무척 특이했다. 마치 생소한 어휘를 가진 제주도 방언처럼 상당히 낯선 모습과 독특한 건축적인 어휘를 보여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제주도의 날씨는 무척 가혹하다고 한다. 이곳의 기후는 바람이 많이 불고 비가 많이 오는데 그 비가 오는 모습이 보통 내리듯 수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영향으로 수평으로 들이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집의 전면을 가로막는 켜가 하나 생성이 된 것이다. 그 공간을 ‘낭간’이라고 하는데, 집 앞에 놓인 툇마루의 역할을 하며 내부와 외부의 완충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의 집은 안거리와 밖거리로 나뉘어 있다. 보통의 우리 옛집들이 안채와 사랑채로 나누는 것과 흡사한 채나눔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대가족이 사는 곳을 남자의 공간과 여자의 공간 등으로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세대별로 즉 부모세대와 아들세대가 사는 채로 나누는 방식인 것이다.

일반적인 민가는 대부분 한 채에서 안방과 건넌방이 나뉘느라 대칭이 되는 디귿자 형인 데 반해, 제주의 집은 11자 배치로 두 채가 나란히 남향을 하며 공존한다. 또한 채마다 각자의 부엌이 있으며 각자의 경제적인 단위를 구성하는 굉장히 독특한 방식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제주도의 독특한 기후에 대한 건축적인 대응이자, 한편으로는 여성의 경제적인 힘이 강한 생활양식과 사회적인 요인이 낳은 형태라 할 수 있다. 

# 올레, 집으로 들어가는 길

요즘 제주도에 사람들이 무척 많이 찾아간다. 나야 예전의 모습을 알 리 없지만, 제주도에 많이 다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전의 제주도는 무척 한가하고 낭만적인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엄청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중국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제주도에 잠시 머물고자 오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올레길인데, 제주도 해안을 빙 둘러 조성되고 설정된 그 길을 사람들은 걷는다.

그런데 올레라는 명칭은 원래 집으로 들어가는 짧은 골목을 말한다. 제주의 집에는 올레가 있다. 올레는 외부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며, 시선을 차단해주는 외부와의 사이에 놓인 완충장치이기도 하다. 보통 한국의 민가들이 폐쇄적인 듯 개방적인 데 반해,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는 제주의 집들은 개방적인 듯 폐쇄적이다. 제주도 건축의 독특한 공간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안뒤’라는 이름을 가진 후원은, 안채로 볼 수 있는 ‘안거리’ 뒤쪽에 구성된 공간이다. 우리 옛집들의 경우 뒷마당을 갈 때 대부분 채와 채 사이의 공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유입되는 것에 반해, 안뒤는 안거리를 통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공간이다.

제주도의 집은 오랜 시간에 걸쳐 특이한 기후와 토양에 최적화된 모습으로 완성된 것이다.

“우선 육지 집과 크게 다른 점은 평면구성에 있어 이쪽(제주)이 분할방식인 데 비해 육지집은 결합방식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쪽집은 집의 뼈대를 만들어놓고 각 방을 나누어가는 방식인데, 저쪽은 기둥과 보를 간이하게 걸어가면서 방들을 덧붙여가는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집 밖으로 방을 증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는데, 육지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인다… 제주도의 민가는 한일자 겹집을 기본으로 하여 분할식으로 평면구성을 하기 때문에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한국의 민가』, 김홍식

성읍마을에서 집을 보고 동네를 나와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과 이국적인 정취에 푹 빠져서 해안과 해안에 접한 동네들을 두루두루 돌아다녔다. 제주도에 한번 다녀온 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에 집을 짓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서귀포 강정해안, 성산포 부근, 상효동 등 한꺼번에 세 군데의 집을 설계하게 되었다. 정작 나를 처음 제주도로 인도한 땅은 서귀포 공항 부지로 편입되는 바람에 집을 짓는 계획이 무산되었다.

나는 마치 그간 못 다녔던 한을 푸는 것처럼 거의 매주 제주도를 들락거리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일들의 진행이 지지부진했다. 그러는 와중에 제주 북항 김만덕 생가 터 근처에 사는 제주도 토박이 한분이 설계를 의뢰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제주도에 집을 짓게 되었다.

그는 제주시 건입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그곳에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이었는데, 제주도에 대해서는 초심자였던 나에게는 무척 필요한 스승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가 들려주는 제주의 특이한 기후와 바람을 가두는 법과 흘러가게 하는 법 등에 대한 이야기는, 평소에 공부로 얻어진 과학적인 지식과 오랜 시간 살면서 얻어진 땅에 대한 이해가 겹쳐진 것이라 무척 생생했다.

우리나라 집들의 주요 관심사는 바람의 통행과 빛의 통행이다. 바람을 통해 기온과 습도를 조절하고 태양의 빛을 여과하고 투과함으로써 조도를 조정하고 기온을 제어한다. 뜨겁고 밝은 마당과 차갑고 습한 후원 사이에 집을 둠으로써, 바람이 지나가고 목조로 지어진 옛집들의 부재가 썩지 않는다. 그런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운 결합이 우리 건축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바다에서 한 켜 뒤로 물러앉아 있는 언덕 위에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로 지어진 제주의 집 유정헌.
옥상에는 작은 방과 바다를 볼 수 있는 지붕이 덮인 테라스가 나온다.
# 바람과 햇볕이 머무는, 유정헌

사실 나에게는 과학이라는 용어만 들으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많은 사람이 흔히 겪는 병이 있다. 나는 과학을 멀리했고 과학 또한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집을 짓는 데도 주로 감성으로 보고, 그것을 종이에 2차원으로 옮기고, 그것을 땅위에 이야기로 쌓아올렸다.

그런데 유정헌의 건축주는 내가 쌓아올리는 이야기 더미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같이 쌓아 올렸다. 나는 집을 짓는 동안 지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태풍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와 태양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제주도라는 특별한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제일 많이 들었다. 앞에서 몰려들어오는 비와 바람 그리고 습기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와, 물이 쉽게 빠져나가는 화산암 지반에서의 건축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땅은 바다에서 한 켜 뒤로 물러앉아 있는 언덕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 머지않은 과거에 언덕 바로 아래까지 바다였다고 한다. 처음 땅에 갔을 때는 바다 쪽으로 열린 전면에 오래된 아파트가 뒤로 돌아앉아 앞을 가리고 있었다. 당연히 전망이라곤 없었다. 그냥 옆구리로 빼꼼히 바다가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되며 비슷한 시기에 김만덕 생가 터 복원 사업이 벌어지고, 우리에게 등을 보이던 낡은 아파트가 어느 날 사라지며 바다 쪽으로 시원한 전망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그리고 엄청난 바람과 비가 몰려 올 것이 예상되었다.

주인은 공부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대학시절 외에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늘 이 동네에서 살았다. 옛집은 오래전 사라졌지만, 그는 집이 있었던 자리를 말끔히 청소해놓고, 직접 마당에 돌을 깔고 잔디를 심어놓았다. 그리고 늘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들러, 앉아서 석양을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이 땅에 지을 집을 상상했다고 한다.

우리는 함께 태양이 집을 훑고 흘러가고 바람이 불어 들어와 머물기도 하는 집을 짓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은 땅모양대로 집을 올리고 가운데를 비우는 방법, 즉 수직으로 뚫린 구멍과 일층을 부분부분 들어내 수평으로 뚫린 구멍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닷가 염분이 강한 바람과, 그 바람에 비가 수평으로 집을 때리는 제주의 기후에 적합한 좀 딱딱한 껍질을 가진 집을 짓기로 했다. 그리고 제주의 안거리와 밖거리를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1층은 밖거리였고 2층은 안거리로 만들어 각각의 독립된 공간을 만들었다.

그 모든 과정은 나의 발의와 집 주인의 과학적인 검증을 거쳤다. 집의 외벽은 콘크리트 상태 그대로 마감을 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너무 매끈한 노출콘크리트 면보다는 조금 거칠고 만드는 과정이 나타나는 콘크리트 면이 좋다. 그리고 알다시피 제주도 고유의 돌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화산암이다. 그래서 바람 부는 제주도 언덕에 짓는 이 집의 외벽이 그런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여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집으로 들어서면 하늘이 뚫린 네모난 중정이 나오고, 현관과 대청, 그리고 사랑방이 바다쪽으로 배열되고, 동쪽과 서쪽은 바람길이 열려 있다. 동쪽은 옆집과 붙어있는 곳인데 오래된 담장이 중정의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남쪽은 주차장과 보일러실 등 기능적인 공간들을 감싼 껍질이 붙어있다. 서북쪽 모서리는 이 집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방향인데 현관과 연결된 계단실을 오르며 그 경치를 보게 된다. 계단이라기보다는 앉아서 바다를 보는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주 생활공간인 2층은 기능에 따른 방을 배치하고, 두 기능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 그 폭을 조금 다르게 해서 변화를 주었고, 다리를 오가며 집 안과 밖의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옥상에는 작은 방과 바다를 볼 수 있는 지붕이 덮인 테라스가 나온다.

주인이 직접 지은 집의 이름은 유정헌(流停軒)으로, 바람은 머물고 햇볕은 이 집을 훑고 지나간다는 의미이다. 제주도의 기후는 변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며 생활의 패턴은 많이 바뀌었고 가족의 구성도 많이 바뀌었다. 좁은 도시의 대지에 두 채의 집을 쌓아놓은 유정헌은 땅의 성질과 기후 그리고 현대의 삶을 함께 담은 집이다. 여기서 주인은 그가 여태껏 머물러왔고 앞으로도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고향 바다를 늘 만나게 될 것이다.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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