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사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수준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서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술전시나 음악회나 공연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고, 미학과에 지원 학생이 늘었는데, 학생 대부분은 ‘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확고한 인식도 갖고 있었다.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 분야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의욕에 넘치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훨씬 더 좋아졌고, 예술과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도 나날이 보다 깊고 넓어져 가고 있다. 미학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린다는 명목으로 해괴한 재단을 만들어 돈을 빼돌리고, 문화관련 인사를 좌지우지했으며, 국가 행사나 국가 브랜드를 만드는 사업에까지 이 몰지각한 사람들의 손이 뻗쳤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일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으니 그 전횡이 어디까지인지도 알 수가 없다. 문화와 예술의 진정한 융성과 발전을 원하는 많은 국민에 대한 모욕이고, 문화와 예술이 눈뜨고 당한 봉변이라 하겠다. 어디부터 잘못됐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문화의 가치를 모르고 개인의 탐욕만을 앞세운 아마추어들과 이들 주장에 동조한 정부의 무관심과 무신경 때문이다.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인사, 사업, 기관 등에 관련된 모든 것이 투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모자가 크면 눈을 가려 앞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큰 모자를 쓰고 앞을 보지 못한 채 부화뇌동했던 전직 관료를 비롯해 지금도 남아 있는 관련 인사를 찾아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예산의 재배분이다. 예술 영화 제작에 매달리고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 죽은 30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과 연극만을 위한 삶을 살아갔던 40대 연극배우 김운하의 죽음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국민의 세금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하는 법이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겉껍데기만을 흉내 내고 포장해 치부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해괴한 사업에 쓰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이게 나라냐’라고 쓰인 푯말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민심을 읽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어렵게 쌓아 올린 우리 문화도 지키고, 상처받은 우리들의 자존심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란 특정한 몇 사람의 생각이나 정부의 획일화된 사업과 정책을 통해서 융성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문화가 우리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생명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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