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라면 구한말처럼 될 것
모두가 귀신에 빠져있는 사회
잃어버린 현재를 되찾아야 사회가 온통 귀신타령이다. 신(神) 자의 훈이 ‘귀신’인 것을 감안하면 귀신과 신은 백지장 차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옛사람들은 귀신을 신처럼 믿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신을 도리어 귀신처럼 사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도착과 착각의 삶의 방식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은 영락없는 선무당이 되어버렸고, 한국문화는 한없이 추락하는 아픔과 분노에 빠져있다. 최순실로 인해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지는 산업화는 어느 덧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다. 최순실과 관련자들의 부정부패와 비리는 법에 의해 판가름 날 것이지만, 문제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다. 쓰러진 곳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역사라고 했던가.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참을 것은 참아야 하고, 과거가 우리 미래의 발목을 잡게 할 수는 없다. 바로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는 것이 귀신이기 때문이다. 귀신타령으로 귀신을 쫓아버릴 수는 없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
산업화와 자본주의화는 반드시 거기에 걸맞은 도덕 윤리와 법치를 병행했어야 했는데 ‘유전무죄 무전유죄’(돈이 있으면 처벌을 면하고, 돈이 없으면 죄를 뒤집어쓴다)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이것에 실패하고 만 것이 우리 현실이다. 역설적으로 현재 가장 타락한 세력이 법조세력이고, 입법부·행정부 등을 장악한 가장 비생산적인 집단인 그들이 가장 대우받는 권력집단이 되고 말았다. 일제 잔재인 ‘전관예우’와 그들만의 ‘카르텔’이 이번 사건을 둘러싼 원인(遠因)이다. 그들의 행태를 보면 내분과 당쟁을 일삼던 조선조의 선비사회를 방불케 한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샤머니즘 현상을 보면서 중세의 종교국가시대(종교지식)에서 근대의 국가종교(과학지식)시대로의 전환이 문화적으로 이렇게 힘드는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대한민국의 국민의식은 아직 하위단위인 지역과 문중과 당파와 기업에 머물러 있다. 이는 역대 대통령의 국가관과 정통성 시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를 밖에서 바라보는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은 구한말처럼 한국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을 것이다.
박 대통령만 샤머니즘 운운할 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자신의 귀신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야당과 운동권의 민주주의 혹은 민중주의 운동도 굿판의 성격이 강하다. 필자는 이를 ‘미친 시인의 사회, 죽은 귀신의 사회’라고 질타한 바 있다.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외래 이데올로기와 도그마에 빠진 채 진정성 없는 ‘가짜 좌우익’만 북적대고 있다. 특히 마르크스샤머니즘들의 인민재판이 귀신사회를 증명하고 있다. 서양의 학문을 그대로 수입해서 벽돌장을 찍어내고 있는 학자들은 우리의 삶, 역사, 전통과는 무관한 텍스트를 앵무새처럼 양산해왔다. 이들은 서양귀신에 잡혀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책과 과거를 배우는 데만 열을 올리는 우리는 모두 서양귀신을 섬기고 있는 셈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살아있는 ‘우리의 현재’를 잃어버렸다. 지적인 사대주의가 실은 샤머니즘이다. 샤머니즘은 유교의 성리학처럼 네오샤머니즘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김동리의 대표작 ‘무녀도(巫女圖)’ 혹은 ‘을화(乙火)’는 한국문화의 심층을 떠올리게 한다.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충돌과 대립을 통해 삶과 죽음의 심층을 파헤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무녀 모화는 기독교인이 된 아들 욱을 예수귀신에 씐 것으로 판단하고 비수를 찌름으로써 죽게 하고 본인은 굿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 무녀도(1936년)를 장편소설로 개작한 것이 을화(1978년)이다. 주인공 ‘을화’는 무녀도에서와 달리 불길 속에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박 대통령을 보면 을화가 생각난다. 을(乙)은 새를 상징한다. 아버지가 이룩한 산업화로 ‘돈(money)신’에 눈먼 국민들의 속죄양이 된 그를 보면 ‘불새’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이니 봉황이라고 한다면, 추락하는 것도 날개가 있다지만 제 몸을 산화하는 봉황은 추락할 것도 없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