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트럼프 쇼크’로 인해 한·미 양국에서 각각 분노의 민심이 끓어오르고 있다. 한국은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인 ‘최순실 게이트’ 파문으로, 미국은 지난 8일(현지시간)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반대시위로 나라 곳곳에서 관련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유로 벌어지는 집회지만 엄청난 확산 속도를 보이는 참여도, 집권자를 향한 분노 표출 등은 비슷한 양상이다.
12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는 당초 예상대로 100만명 넘는 대규모 인파가 몰렸다. 21세기 최대 규모의 촛불이 시민들의 분노와 함께 타올랐다.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이날 오후 7시30분쯤 광화문 광장, 종로, 서대문 등 서울 시내 일대에 100만명의 시민들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지난 10월말 3만명이 모인 1차 촛불집회(10/29) 이후 2차 집회(11/5) 때 서울만 20만명, 전국적으로 30만명이 참가한 데 이어 이날 3차 집회에는 무려 100만명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든 것이다.
이 같은 엄청난 집회 확산 속도는 ‘반 트럼프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미국도 사정이 비슷하다. 11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대선 다음 날인 9일 보스턴, 캘리포니아 버클리 등 동서부 주요 도시에서 대학생 등을 주축으로 시작된 트럼프 반대 시위는 이틀 만에 수도 워싱턴D.C와 뉴욕 등 10개 도시에서 수천명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로 번졌고, 사흘째 계속되고 있다.
미국에 거주 중이라는 A씨는 이날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미국 내 트럼프 당선 반대시위 정도가 굉장히 격해지고 있다”며 “절대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모여들어 반대시위에 참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미국 내 많은 시위가 있어 왔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현지 언론 등을 통해 전해진 시위 현장의 모습은 광화문 광장의 촛불집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양한 문구의 피켓을 들고 모인 수많은 인파, 대통령의 존재를 부정하는 문구 내용 등이 겹쳐졌다. 광화문에서는 “박근혜는 하야하라”, “청와대는 해체하라” 등의 구호가, 뉴욕 맨해튼에서는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 “트럼프를 탄핵하라”는 외침이 울려퍼졌다.
분노의 대상을 에워싸는 행진의 모습도 유사했다. 당초 경찰이 청와대 인근 행진을 불허했지만 법원이 12일 청와대 앞 행진을 허가하라고 결정하면서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이어갔다. 10일 맨해튼 주요 장소에서 모인 반 트럼프 시위대는 트럼프가 사는 5번가 ‘트럼프타워’와 트럼프 가족이 경영하는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앞까지 행진했다.
한국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해시태그 등을 통해 집회 참여를 독려하고 평화 집회를 다짐하는 등 촛불 민심이 번지는 것처럼 미국에서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클린턴이 당선돼야 한다는 주장 등이 확산하는 모양새다. 온라인 청원 사이트 ‘체인지’에는 실질적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주별 선거인단에 클린턴을 뽑도록 촉구하는 청원이 개설돼 한국시간 11일 오전 기준 110만명이 서명했다. 클린턴이 트럼프보다 더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인단 경쟁에서는 져 패배했기 때문이다. 클린턴 지지자인 팝스타 레이디 가가 등이 참여를 독려하면서 온라인 청원 참여자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한편 12일 3차 촛불집회를 대비해 272개 중대 2만5000명의 병력을 배치한 경찰은 이날 청와대 행진을 막기 위한 차벽 설치로 119 구조대 진입과 시민 통행을 방해하는 등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서울역 일대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대형 버스들의 주차 문제로 경찰과 시민 사이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미국은 오리건주 포틀랜드 경찰국이 트럼프 반대 집회를 ‘폭동’으로 규정한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그러나 반 트럼프 시위는 유리병 투척과 방화, 기물파손 행위가 등장하는 등 일부 지역에서 실제 과격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 시위는 안 된다”며 수차례 촛불집회에도 평화 시위를 이어 간 광화문 집회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사진=연합뉴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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