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은 ‘구체제의 종언’을 이야기한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권위주의에 기반한 구시대적 통치방식은 폐기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1987년 개헌으로 5년 단임 대통령제가 도입된 이후 6명의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모두 ‘실패한 대통령’이란 낙인을 피하지 못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공범 혐의를 받는 박 대통령은 최악의 사례다. 개인의 리더십도 문제였지만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쏠리는 제도적 폐해가 컸다. 최순실 세력은 그 권력을 뒷배 삼아 청와대, 정부를 무력화하고 기업을 농락했다. 역대 정부에서 빼놓지 않고 측근 비리가 발생했던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구조 개편 문제를 건너뛰고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하긴 어렵다. 국회 개헌 추진 모임에 개헌 가능 의석 수(200)에 가까운 190여명이 참여한 것도 제왕적 대통령제, 승자 독식의 정치구조로는 더 이상 국가 발전이 어렵다는 공감대가 깔려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이 권력분산형 개헌 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민주당 주류가 반대하는 한 ‘개헌 열차’를 궤도에 올리는 건 쉽지 않다.
문 전 대표는 어제 “구악을 청산할 국가대청소가 필요하다”며 비리·부패 공범자 청산 등 6대 추진과제를 제안했다. ‘국가대청소’를 말하면서 국가시스템, 정치문화를 바꿀 개헌 논의는 새누리당의 정권 연장 ‘꼼수’라고 일축한다. 최대한 빨리 대선을 치르는 게 유리한 만큼 선거판을 흔드는 개헌 논의는 봉쇄하겠다는 정략적 태도다. 이는 촛불이 국가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민심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당장 개헌이 어렵다고 뒤로 미뤄 놓아선 안 된다.
이번 국정농단 사건에서 드러난 정경유착, 검찰 수사의 중립성 논란도 반드시 제도적으로 개선돼야 할 사안이다. 이미 국회에는 재벌총수 전횡을 막기 위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검찰 기소독점권을 제한하는 법률안이 계류돼 있다. 국회 선진화법 보완도 시급하다.
탄핵 국면에 보여준 국민들의 질서 있는 민의 표출은 내년 30년을 맞는 1987년 체제의 극복 또한 질서 있게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 특정 정치인, 특정 계파의 이해득실을 떠나 성숙한 민주주의, 공정한 사회, 협치의 정치시스템을 제도화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국민이 만든 대변혁의 기회를 정치권이 당리당략에 눈이 멀어 날리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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