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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것은 보내야 한다. 마냥 움켜쥔다고 머무르지도 않는다. 보낸다고 다시 못 볼 것도 없다. 다만 지금 이곳에서 마무리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할 일이다. 미련이 남아서 맺지 못하는 것들을 돌아볼 시점이다.

화재로 부모와 남동생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소녀가 있었다. 보육원으로 가게 된 소녀는 한동안 침울하게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구석진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만 있었다. 소녀가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것은 한 소년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퀭하게 들어간 두 눈동자가 소년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소녀가 화들짝 일어나 소년에게 다가와 소년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소년은 놀라서 소녀의 품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소녀는 완강한 힘으로 소년을 놓아주지 않았다. 급기야 소년이 울음을 터트리자 원장수녀가 달려와 겨우 그에게서 소녀를 떼어놓았다. 소년이 울음을 그치자 이번에는 소녀가 울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우는 소녀는 아무리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소년을 향해 두 손을 내저으며 방성통곡을 할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소년을 소녀에게 보내자 소녀는 소년을 꼭 껴안고 뜨겁게 쏟아져내리는 눈물로 소년의 등을 적셨다.

그렇게 여덟 살 소녀와 여섯 살 소년은 처음 만났다. 이후로 소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함부로 소년의 곁에 올 수 없었다. 누구라도 소년에게 다가와 살갑게 웃거나 손이라도 잡을라치면 소녀는 성난 살쾡이처럼 상대방의 얼굴을 할퀴어버렸다. 소년에게만큼은 극진했다. 짐승이 갓 낳은 새끼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주위를 맴돌 듯 소년을 보호했다. 말이 보호였지, 소년에게는 소녀의 그러한 맹목적인 감싸기가 몹시 힘겨웠다. 보육원에서 강제로 소년과 소녀를 떼어놓았다. 보육원 입구를 나서던 날, 소년은 종탑방에 갇힌 소녀가 울부짖는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성장해서도 여자는 남자를 수소문했고 다시 찾아와 강박적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불 속에 놓아두고 나온 어린 동생의 이미지를 그에게 그렇게 내내 투사했던 모양이다. 끝내, 여자는 옛 성당 종탑에 올라 생을 마감했다.

아무리 아파도 거둘 것은 거두고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다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올 한 해도 이제 채 보름이 남지 않았다. 매일 똑같이 뜨고 지는 해이지만 인간들이 정한 날짜를 기준으로 지나온 생활과 정서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자가 몸을 날린 탑에서 세모의 종소리가 들린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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