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많은 비교가 이뤄진 1974년 미국 대통령 닉슨 탄핵 시발점에도 복사기가 놓여 있다. 미국 정부 요원이 야당 사무실을 도청한 사건으로 잘 알려진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미국 언론·대중에 부각되고 탄핵에까지 이르게 된 근저에는 ‘펜타곤 문건’ 내부제보자에 대한 도청 사건이 있다.
박성준 산업부 차장 |
미 국방부·방산업계와 밀접한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 금고속에서 잠자던 펜타곤 문건이 세상에 나오게 된 건 앞날이 창창했던 두 명의 엘리트 덕분이다. 하버드대 최우등졸업·미 해병대 중대장 출신으로 미국 외교안보 최상층부에서 브레인으로 활동하던 다니엘 엘스버그와 프린스턴대 박사 출신 앤소니 루소가 주인공이다. 랜드연구소 직원이었던 이들은 연구소 밖으로 한 장이라도 갖고 나가면 ‘간첩죄’로 처벌받는 줄 알면서도 “세상에 알리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결심을 실행했다.
워낙 분량이 많아 엘스버그가 여러 날에 걸쳐 서류가방에 원본을 숨겨 가지고 나와 복사한 후 되돌려놓았다. 요즘 초고속 복사기는 분당 60∼100장씩 복사할 수 있다는데 60년대 처음 등장한 상업용 복사기는 1장 복사에만 7초가 걸렸다. 극비문서 7000여장은 루소 여자친구가 운영하는 꽃집 위층 광고회사 사무실에서 여러 날 밤에 걸쳐 복사됐다.
결국 뉴욕타임스는 펜타곤 문건 보도로 베트남전이 미국 정부와 군수업체, 반공주의자가 결탁한 침략전쟁이었음을 밝혀낸다.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를 구실로 이를 막았으나 법원은 언론자유의 손을 들어준다. 이렇게 역사가 기록되기까지 두 명의 내부제보자가 겪은 고난은 파란만장하다. 엘스버그가 처음부터 극비문서를 언론에 제보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장학재단 설립자로 유명한 윌리엄 풀브라이트 당시 상원의원, 키신저 국가안보자문 등에게 문건을 전달해 의회나 정치권이 이 문제를 다루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모두 극비문서 공개에 따른 법적 문제 때문에 몸을 사려 결국 언론 제보를 택한 것이다.
보도 이후 미국 정부의 대응은 가혹했다. 미 검찰은 절도죄와 간첩죄 등 총 12개 중죄 위반 혐의로 그에게 125년형을 구형했다. 루소는 문건 복사 상황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다 수감됐으며 나중에 3건의 중죄 위반으로 기소된다. 엘스버그는 자서전에서 애초 자신이 처벌받을 것을 각오했다고 밝혔다. 다만 복사를 도와준 것뿐인 루소까지 기소가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루소는 훗날 “그 사건으로 인생이 엉망이 됐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자평했다.
2년 4개월 정도 진행됐던 이들의 재판은 중도 무산된다. 엘스버그 등은 “외국정부가 아니라 미국 의회와 언론에 제보한 것이므로 간첩죄가 아니고 이득을 본 것도 없으므로 절도죄도 아니다”는 주장을 폈다. 백악관은 엘스버그를 인신공격하기 위해 전직 CIA·FBI 요원들로 ‘배관공들’이라는 공작팀을 꾸려 엘스버그 심리치료사 사무실을 뒤지고 불법 도청까지 했다. 이 같은 사실은 훗날 배관공들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던 민주당 전국본부에 잠입하다 체포되면서 드러났다.
용기 있는 이의 문건 제보와 정권의 가혹한 보복이 결국 대통령 탄핵으로 끝난 점에서 펜타곤 문건의 운명은 정윤회 문건과 비슷하다. 반전운동가이자 언론 자유의 옹호자로 아직도 활동 중인 엘스버그는 ‘내부제보자의 신화’로 존경받았다. 정윤회 문건 제보자에게도 용기에 걸맞은 명예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부여되길 바란다.
박성준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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