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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희' 최승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개성 넘치는 패션 연출 감각… ‘조선의 춤’ 진수를 선보이다

입력 : 2017-01-07 03:00:00 수정 : 2017-01-06 20: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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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계의 무용가로 우뚝 선 ‘마케팅의 달인’ “어느 틈에 머리는 깎고 에나멜 구두에 긴 양말, 날씬한 다리 위로 바둑판 무늬의 외투를 걸치고 있었으며 모자 밑에 빛나는 눈동자에는 반가운 눈물이 어리었다.”

이것이 열일곱 살 때 최승희의 모습이다. 1927년 10월 24일 아침, 경성역에 내린 최승희를 보고 쓴 매일신보 기사의 일부이다. 일본으로 무용 유학을 떠난 지 1년 반 만의 첫 귀국길에 선보인 ‘최승희 패션’이었다. 당시 찍은 기념사진 속에서 주로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는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도 최승희는 단연 돋보인다. 번쩍거리는 광택이 특징인 에나멜 구두나 과감한 체크무늬 외투를 선택한 안목만 보더라도 최승희의 뛰어난 자기 연출 감각이 짐작된다. 나중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단발머리도 이때 벌써 시작한 것이다. 


최승희의 ‘보살춤’
무려 9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신여성’ 최승희의 세련미가 느껴진다. 남들 앞에 나설 때와는 달리 집에서 최승희는 전혀 달랐다. 최승희 제자이자 동서로서 꽤 오랜 기간 같이 지낸 김백봉 경희대 명예교수는 “평소엔 그냥 아무거나 막 입었다”고 증언한다. “정말 무슨 옷일까 할 정도로 모양 없는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시동생 안제승 전 경희대 교수의 말에 따르면 최승희는 “한국의 전래적인 귀태 같은 게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에는 화장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메이크업으로 얼굴을 일부러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보이려고 했다. 그저 아이섀도 약간 칠하고, 분가루 바르고, 밑에 기초화장을 조금 했다.”

그런 최승희가 외출할 때 대변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성 넘치는 패션 연출 능력 덕분이었다. 고급 옷, 비싼 보석 등으로 코디네이션을 화려하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최승희가 자신의 개성을 맘껏 뽐내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약이 많았다. 그럼에도 최승희는 몇 가지 패션 소품만으로도 한눈에 남들의 주목을 끌어내는 재주가 뛰어났다.


‘장구춤’. 최승희는 175㎝의 큰 키에 서구형 체격이었다. 반면 얼굴은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최승희의 외모 특징을 한껏 드러낸 작품이 ‘장구춤’이다.
“최대로 서구적인 모양을 냈다”는 것이 김백봉의 목격담이다. 하이힐을 신고, 모자를 썼던 것이 대표적이다. 김백봉의 전언처럼 모자 하나라도 ‘희한한 것’을 쓰는 식이었다. 무대 인사를 할 때 등 밝은 조명이 있는 곳에서 최승희는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 이 또한 조명 효과를 고려한 치밀한 계산에 따른 선택이었다.

최승희는 그 이유를 “‘어, 최승희다!’ 하고 보는 걸 희한해할 정도가 되어야 인기가 나오는 것이다. 언제나 볼 수 있고 언제나 만날 수 있으면 인기가 안 나온다”고 설명했다. 안제승이 형수 최승희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나중에 회고담에서 밝힌 말이다. 그 결과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올리면 차가 와서 멈추고 운전수가 모자를 벗고 내려와 문을 열어주었다”고 안제승은 말한다.

최승희는 이처럼 일반 대중들의 모습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추구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물론 이는 항상 ‘당대 최고’를 추구했던 최승희만의 이미지 관리 방식이긴 했다. 단순히 이런 차원을 넘어 최승희 식의 치밀한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939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선 최승희. 1939년 1월부터 유럽순회공연을 한 최승희는 당시 한국을 잘 알지 못하는 유럽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조선의 춤을 통해 신비스러운 동양 무용의 진수를 맛보게 하는 두 가지 전략을 세웠다. 순회공연은 유럽 현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최승희가 서구형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었던 원천은 바로 서양인들과 견줄 만한 체격 조건이었다. 최승희는 우선 키가 175㎝로, 당시 동양 여성으로서는 아주 컸다. 평소 몸무게도 55㎏ 안팎으로 통통한 데다, 얼굴 또한 큰 편이었다. 이런 최승희의 외모를 두고 김백봉은 “선생님(최승희) 아버님(최준현)이 잘 생겼다. 골격도 참 좋았다. 그걸 닮으신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큰 체격이 무용을 하는 여성에게 늘 장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의식한 듯 최승희는 자신의 키를 소개할 때 때로는 ‘173(㎝)’이라고 줄여서 말하곤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최승희는 자신의 춤의 세계를 펼치는 데 남보다 우월한 신체 조건을 최대한 활용했다. 최승희가 남성 춤도 잘 추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이영욱 전 중국 연변대 무용과 교수는 최승희의 남성 춤에 대해 “박력이 넘쳤다”고 2009년 11월 제3회 최승희국제무용포럼 기자회견 자리에서 밝힌 적이 있다. “최승희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추는 남성 춤은 박력이 넘치는 굉장히 남성적인 느낌”이라고 증언했다. 최승희는 1958년 1월에 펴낸 ‘조선민족무용기본’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성 춤의 손치기, 무릎치기 등의 동작을 등장시키고 있다. 


1927년 10월 24일 일본 유학 1년 반 만에 첫 귀국한 최승희(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경성역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에나멜 구두와 체크무늬 외투,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단발머리는 지금 봐도 세련된 모습이다.
서구형 체격에 비해 김백봉이 묘사하는 최승희의 얼굴 생김새는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선생님은 이마가 좁았다. 그런데 가발을 쓰면 잘 맞았다. 또 눈썹이 세 개 정도밖에 안 붙어 있는데 자연스럽게 싹 본인이 그린다. 턱밑이라든가 코도 작았다. 그런데 선이 참 좋았다.” 그래서인지 최승희는 “보통 분장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안 쓴 편”이었다고 한다. 이런 외모의 특징을 한껏 드러낸 최승희의 작품이 ‘장구춤’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최승희의 ‘장구춤’ 사진에서 엿볼 수 있는 무대 자태는 지금 보아도 매우 고혹적이다. 사실은 최승희가 장구를 치는 데 별로 능숙한 편이 아니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한복 의상을 차려입고, 김백봉의 말처럼 쪽진 머리 가발 하나로 전형적인 한국 여인으로 변신한다. 최승희의 무용 실력은 무대에서 모자라는 장구 솜씨를 완벽하게 덮을 만큼 빼어났다.

최승희가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것은 1939년 1월부터 여름까지 계속된 유럽순회공연이었다. 최승희의 유럽순회공연 성공은 한마디로 마케팅의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마케팅 전략은 최승희·안막 부부의 합작품이었다. 특히 남편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 직전인 1938년 최승희는 미국순회공연의 중단으로 1년 가까이 실의에 빠져 있었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그런 최승희에게 탈출구로 유럽순회공연을 먼저 제안한 사람이 안막이었다. 당시 유럽순회공연 때 최승희와 안막이 노린 마케팅 전략은 두 가지쯤이었다. 당시까지 코리아를 잘 알지 못하는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것이 첫째였다. 두 번째는 최승희가 추는 조선의 춤을 통해 신비스러운 동양 무용의 진수를 맛보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모험적 시도가 몇 가지 있었다. 이름은 일본식 발음인 ‘사이 쇼오키(Sai Shoki)’로 썼다. 하지만 국적은 ’재패니스‘가 아닌 ’코리안‘을 처음으로 내세웠다. 유럽순회공연 전반기에는 20개가 넘는 프로그램 대부분을 우리 전통 춤으로 구성했다. 음악도 레코드가 아닌 생음악을 사용했다. 양악기도 거의 등장시키지 않았다. 우리 전통 음악을 연주할 최고 기량을 지닌 조선의 악사들을 뽑아 처음부터 대동했다. 그 마케팅 전략은 적중했다. 여기에 최승희의 타고난 무용 실력까지 더해져 당시 유럽인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공연장마다 객석이 관중들로 꽉 들어찼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앙코르 요청이 잇달았다. 유럽 데뷔 공연이었던 그해 1월 프랑스 파리에 이어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5월까지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당시 유럽인들의 이런 반응을 짐작할 수 있는 현지 신문 기사들이 지금까지 가족들에 의해 잘 보관되고 있다. 최승희가 자신의 공연평이 실린 당시 기사들을 꼼꼼히 스크랩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해 4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연 때 현지 신문기사도 그중 하나다. 최승희의 여러 공연 작품 중 ‘보살춤’이 인상적이었던지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얼핏 보기에 전혀 표정이 없는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변화되는 얼굴의 아름다움, 그리고 수시로 변하는 손짓, 리드미컬한 음악의 반주, 그이가 표출해내는 조각적이고 색채적인 아름다움-최승희 춤은 이처럼 독창적이면서도 매혹적이어서 위대한 인상을 준다.”

최승희는 평생 ‘이태리 정원’ 등 너댓 개의 음반을 냈다. 내가 최근에 다시 들어본 최승희의 노래 솜씨는 그리 잘 부르는 편이 아니다. 다만 빼어난 반주만큼은 듣는 사람의 귀를 단번에 매료시키고 만다. 최승희는 또 ‘반도의 무희’ 등 몇 편의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지금껏 영화배우로서 최승희 연기력을 칭찬하는 얘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노래든, 영화든 최승희는 모두 자신의 무용 마케팅 차원에서 기꺼이 직접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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