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딱지가 내려 앉을 지경이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인사들은 민감한 질문에는 하나같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정치인들의 ‘형편 없는’ 기억력이야 어제오늘 일은 아니라지만, 이 정도면 심각한 수준이다. 정치인, 공무원, 기업인 등 소위 엘리트 인사들은 왜 청문회장에만 들어서면 급격한 기억력 감퇴에 빠지는 걸까. “기억에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은 과연 믿어도 될까.
◆인간의 기억은 무한하다? 영구기억과 망각현상
과거 겪었던 사건들이 본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거나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면, 어렵지 않게 기억을 해낼 가능성이 높다. 한 번 인상적으로 저장된 기억은 까먹는 것이 영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인지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기억은 최소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의식이 있는 수준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정보가 이용되는 ‘운용기억(working memory)’과 무의식 저편에 존재하는 ‘영구기억(permanent memory)’이 그것이다. 의식으로부터 단절된 정보에 대한 기억을 이르는 영구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 성함이나 생애 첫키스 장소 등 평소엔 지각하지 못하더라도 특정 자극을 받으면 떠오르는 기억들을 말한다. 평소 의식하진 않지만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끄집어낼 수 있는 군번이나 주민등록번호도 영구기억이다.
평범치 않았던 일이나 ‘의미 있는’ 사건들은 설령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영구기억의 영역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나 입대하는 날, 결혼식 날처럼 자극이 클수록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특히 ‘닻(anchor)’ 역할을 하는 특별한 사건이 있으면 주변 기억을 떠올리기가 한결 쉽다. 기억의 구조상 하나의 정보를 떠올리더라도 연관된 여러 정보들이 덩어리로 동시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를 ‘활성화(activation)’라고 한다.
예컨대 몇년 후 누군가 ‘탄핵’이란 단어를 본다면 무의식적으로 ‘박근혜’나 ‘최순실’, ‘정유라’ 등 관련 인물들 또는 촛불집회, 대국민담화 등 일련의 사건들이 순식간에 떠오를 것이다. 자연재해나 화재, 건물 붕괴, 대형 재난 등 ‘잊기 힘든’ 사건을 겪거나 본 사람들이 “아, 그때 나는 OO하고 있었는데…”라며 당시를 어렵지 않게 회상하는 건 그래서다. 특정 사건을 지렛대 삼으면 주변 기억을 비교적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한때 유행했던 ‘연상암기법’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학계에선 용량이 매우 제한된 운용기억과 달리 영구기억의 용량은 거의 무한하다고 본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평생동안 저장하는 정보는 1768년에 처음 발간돼 등재된 항목만 12만개에 이르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과 비견된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당장 지난주에 있었던 일도 쉽게 잊어버리곤 하는데, 이는 기억의 ‘망각현상’ 때문이다. 망각의 원인을 두고 학계에선 영구기억 속 정보가 서서히 사라진다는 ‘쇠퇴이론(decay theory)’과 다른 정보의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방해받는다는 ‘방해이론(interference theory)’이 대립했다. 이후 여러 연구들이 방해이론의 손을 들어줬는데, 정보가 기억에서 아예 사라진다기보다 다양한 이유로 ‘꺼내기 힘들어진다’가 맞다는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길을 가다가 어디서 본 듯한 누군가로부터 인사를 받았을 때 당장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한동안 곰곰이 생각한 뒤 ‘아, 그 사람!’하고 떠올려본 일은 누구나 겪어 봤을 것이다. 또 막상 시험 볼 때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던 수학공식이나 인물의 이름이 시험을 본 뒤 누군가 내뱉은 짧은 한 마디에 ‘아 맞다!’ 하면서 떠오른 일도 있을 것이다. 한 번 영구기억에 입력된 정보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의 ‘망각’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억울해요. 제 기억은…” ‘거짓기억’도 자꾸 되뇌면
한편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사실을 왜곡되게 받아들여 기억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잘못된 정보를 반복해 접하거나, 사실과 다르더라도 확고한 ‘믿음’이 있으면 기억은 쉽게 왜곡되는데, 최근 등장한 ‘뇌피셜’(상상한 것을 사실인 양 주장하는 것)이란 신조어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달 12일 저널 ‘메모리(Memory)’에 실린 영국 워릭대학교 연구팀 연구에 따르면 실험 참가자들에게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사건을 지속적으로 상상하도록 한 결과 절반가량의 참가자들이 ‘거짓기억(false memory)’을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실험에 참가한 400명의 참가자들 중 53%가 전혀 겪은 적 없는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거나 ‘친척의 결혼식에서 소동을 일으켰다’는 등 거짓 사건을 계속해 상상하도록 하는 ‘기억 주입’을 받고 난 뒤 이 사건들이 실재한다고 믿었다. 이 중 30%는 연구팀이 제시하지 않은 내용까지 스스로 만들어내 설명하기까지 하는 등 허위 상황에 완벽히 빠져버렸다. 나머지 중 23%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연구를 이끈 킴벌리 웨이드 박사(심리학)는 “계속 어떤 일을 떠올리도록 하거나 사진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잘못된 믿음이나 기억은 쉽게 만들어진다”며 “사람들에게 기억이 얼마나 조작되기 쉬운지에 대해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만약 주변에 누가봐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사실이다”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당사자는 ‘거짓기억’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본인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까지 덩달아 “그게 맞다”며 호응한다면 거짓기억은 더 선명해지게 된다. 거짓기억을 떠올린 사람은 사람들의 지적이 커질 수록 왜곡된 기억을 반복해 되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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