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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희’ 최승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불쑥 던진 한마디 말도 까먹으면 불호령 ‘호랑이 선생님’

입력 : 2017-01-21 03:00:00 수정 : 2017-01-20 19: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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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자들이 말하는 스승 “엄지발가락에는 힘을 주고 새끼발가락에는 힘을 주지 말라.”

무용가 김백봉이 평생 잊지 못하는 스승의 말 중 한 가지다. 여기서 스승은 당연히 최승희다. 김백봉이 이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최승희의 엄한 가르침 때문이다. 최승희는 스승으로서 불쑥 던진 한마디일지라도 제자들이 혹여 까먹으면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

최승희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최승희가 한 제자에게 헝겊 한 조각을 내밀었다. 최승희가 직접 무대의상을 만들다 남은 자투리였다. “이거 갖다 잘 둬”라는 한마디 당부와 함께였다.

최승희가 1929년 겨울 경성에서 개원한 최승희무용연구소 단원들과 함께 자리했다.
그리고 1년쯤 뒤에 갑자기 그 제자에게 “내가 너한테 옥양목 한 조각 잘 두라고 했지. 그거 가져와”라고 말했다. 이 상황에서 제자가 “‘선생님, 그거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가는 그날로 연구소를 나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시동생 안제승의 회고담에 나오는 내용이다. 평소에 스승의 말을 제자들이 얼마나 귀담아 들었는지를 최승희는 이런 식으로 확인을 했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제자들은 동북아 주변국에 널리 퍼져 있다. 한국은 물론 북한, 일본, 중국 등이 그곳이다. 4개국 모두 최승희가 무용연구소를 운영한 곳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최승희가 최초로 ‘최승희무용연구소’란 이름의 문패를 단 것은 1929년 경성에서였다. 첫 연구소가 문을 연 곳은 남대문 밖 후루이치정(古市町)이었다. 서울역 정면 건너편 남산 기슭으로 지금의 용산구 동자동에 해당한다.

이때가 1929년 겨울로,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세 번째 경성 공연이 끝난 직후였다. 최승희는 이에 앞서 4월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와 3년 계약이 끝나 8월 말쯤 이미 귀국해 있었다. 최승희가 당시 ‘배신자’ 소리를 들어가면서 이시이 바쿠의 품을 서둘러 떠난 것은 오로지 ‘장래에 대한 심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1933년 최승희와 김민자의 ‘희망을 안고’.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 “그럴 때마다 내겐 모든 것을 스스로 부딪히며 살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졌다”고 심경을 밝히고 있다. 때마침 최승희는 앞서 말한 불안감을 덜어줄 만한 솔깃한 제안을 받고 있었다. 러시아영사관 후원으로 러시아 유학 권유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러시아행은 결국은 불발됐다. 당시 최승희의 가슴속에서는 조선 고전무용의 부활이라는 무거운 사명감이 불타오를 때였다. 그때 심경을 최승희는 나중에 이렇게 술회했다.

“훌륭한 우리의 유산마저 온전히 보전하지 못해온 조선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때 내게는 아직 미숙한 솜씨나마 고향에 새로운 무용을 건설하고 사멸해 가는 고전무용을 부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이나 절실하게 박혀 있었다.”

최승희가 독자적인 무용연구소를 설립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한 당시 여러 신문에 연구생을 모집한다는 광고성 기사가 실린다. 최승희와 오빠 최승일이 여러 신문사를 돌면서 발품을 팔고 안면으로 부탁한 덕분이었다. ‘무용을 하고 싶은 여자’가 연구생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합숙비는 받지 않고, 공연 때는 수당도 지급한다는 ‘당근’도 곁들인 내용이었다. 

경성에 세운 최승희무용연구소 초창기 시절에 최승희가 연구소 제자들과 함께 ‘농부춤’에 출연하고 있다.
무용하는 여자를 기생쯤으로 여기는 인습이 뿌리 박혀 있던 시절이다. 최승희는 신문 기사를 보고 과연 찾아오는 연구생이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첫 연구생 이름으로 15명가량이 연구소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최승희로서는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최승희가 채 20살도 되기 전이었다. 제자라고 해야 불과 몇 살 아래 동생뻘이 대부분이었다.

‘최승희의 1호 제자’를 자처하는 김민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최승희가 초창기에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김민자다. 최승희의 말을 빌리면 ‘나와 고생을 같이하던’ 사람이었다. 1913년생으로 불과 두 살 아래였다. 1930년대 최승희와 호흡이 잘맞는 가장 오랜 무용 파트너였다. 특히 최승희와 김민자의 듀엣 춤을 두고 당시 ‘환상의 조합’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이를 보여준 대표적 듀엣 작품으로 ‘청춘’ ‘희망을 안고’ ‘조선풍의 듀엣’ 등이 꼽힌다.

1935년 최승희와 김민자가 ‘청춘’을 추고 있다.
최승희가 이 제자들과 함께 섰던 첫 무대가 1930년 2월 열린 ‘제1회 최승희무용발표회’다. 최승희무용연구소가 문을 연지 불과 서너달 만의 일이었다. 이 공연은 2월 1~2일 이틀 동안 지금의 소공동인 하세가와(長谷川)정 경성 공회당에서 열렸다. 공연장에 관객들이 꽉 들어찰 정도로 흥행은 성공적이었다. 이 공연에는 ‘영산무’ ‘괴로운 서녀’ 등 신작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무용에 관한 한 초짜 일색인 제자들을 이 무대에 세우기 위해 최승희가 얼마나 강행군을 시켰을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처럼 최승희는 의욕은 넘쳤지만 연구소 살림살이는 늘 쪼들렸다. 연구소 간판을 들고 짧은 기간에 몇 번의 이사를 다녀야 할 만큼이었다. 1년쯤 지난 뒤인 1930년 11월, 최승희는 경복궁 서쪽인 종로구 적선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그곳에 빈집을 소유하고 있던 한 후원자의 호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8개월여 만인 1931년 7월 다시 한강변 서빙고동으로 옮겼다. 이곳은 그해 5월 안막과 결혼한 최승희의 신혼 살림집도 겸했다.

최승희는 경성에서 3년 동안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겪은 가장 큰 고통이 ‘연구소 유지 문제’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조광(朝光) 1940년 9월호에 기고한 ‘나의 무용 15년’이라는 제목의 회고담에서다. 최승희는 3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총 7회의 신작발표회를 비롯해 수많은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흥행이 기대에 못 미쳤던 모양이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회를 거듭하여 갈싸록 첫재(째) 흥미를 늦기지 못하는 탓인지, 내 자신의 력양이 부족하야 그렀음이었는지 보러오는 손(님)들이 늘지를 아니하고 오히려 주러드렀든 것이었다.”

이로 인해 최승희는 “연구소의 허다한 식구들의 생활문제와 유지문제가 큰 고통”이었다고 이 글에서 토로하고 있다. 이런 최승희를 돕기 위해 아버지는 관리자로, 오빠는 매니저로 기꺼이 나서 일을 거들었다. 당시 최승희는 발등에 떨어진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장천 옵바(오빠)와 가티 타개할 방침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중 하나가 든든한 후원자를 구하는 것이었다. 최승희는 “무조건 하고 희생적으로 원조와 동정을 하여주려는 특지가가 있어야 할 터인데 이것이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었다”고 당시 고충을 토로했다.

이 글에서 최승희는 그 속사정을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사실 누구의 소개로 그러한 특지가가 있기는 하였으나 매번 맛(만)나를 보면 처음 맛나서 이야기하든 때보다 이야기가 달나지는 것을 보고는 옵바가 압장을 나서서 반대를 하였든 것이었다.”

결국 오빠 최승일이 내린 결론은 “하는 수 없다. 너는 시집을 가거라”였다. 최승희는 오빠의 소개로 1931년 5월 안막과 결혼을 했고, 이듬해 7월 딸 승자를 출산한다. 최승희는 몸조리를 겸해 한동안 시댁이 있는 경기도 안성으로 내려가 생활했다. 설상가상으로 산후 후유증으로 발병한 늑막염으로 투병생활까지 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겹쳤다. 이즈음 최승희는 ‘무용생활이 아주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을 만큼 절박한 처지였다. “동경으로 와서 재출발을 하자”는 탈출구를 마련해 준 것은 남편 안막이었다. 불가능해 보이던 이시이 바쿠 문하로의 귀환도 안막이 주선한 것이었다.

최승희는 여기서 큰 용기를 얻어 “자! 생명을 내여걸고 재출발을 하여보자”고 최종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33년 2월 2차 일본행에 나선다. 이때 최승희가 유일하게 데리고 간 경성시절 제자가 바로 김민자였다. 최승희는 “서로 의지도 되고 또 무용도 서로 연구를 할 겸”이었다고 말한다.

김민자는 최승희의 젖먹이 딸 안승자를 등에 업고 일본행에 동행했다. 김민자는 도쿄에서 거의 7년 동안 안승자를 도맡아 키우는 보모 역할을 했다. 1937년 최승희가 세계순회공연을 떠난 뒤 김민자는 사실상 혼자서 도쿄 최승희무용연구소 운영 책임을 맡기도 했다. 당시 사제관계는 이처럼 가족 또는 그 이상의 관계였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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