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전 비서관은 박 대통령 지시로 기밀문서를 최씨에게 전달했음을 시인했다. 그가 최씨에게 전달한 청와대 문건은 18대 대선 직후인 2013년 1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대통령의 외국 수반과의 통화 내용, 장차관 인사안 같은 기밀 47건 등 180건이다. 그는 “최씨가 수정해 온 내용이 잘 고쳐졌다고 생각되면 반영하고 문제가 있으면 ‘킬’한(쓰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최순실이 권력서열 1위’라는 세간의 평이 뜬소문이 아닌 셈이다.
정 전 비서관은 박 대통령이 차명폰을 사용했다는 사실도 털어놨다. 그는 “대통령도 차명 전화를 쓴다. 차명 전화로 연락하는 경우가 있었다”며 “도청 위험성에 대비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박 대통령이 사용한 차명폰은 최씨가 만들어 건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범죄집단에서 사용하는 대포폰일 수 있다. 어느 경우든 전기통신사업법상 불법이다. 법과 질서를 수범해야 할 대통령이 불법 전화기를 사용한 것만 해도 대통령으로서 결격사유다.
2년여 전 정의화 당시 국회의장은 “대통령에게 2번 통화를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전화가 꺼져 있어 통화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다. 대통령이 차명폰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니 공적 소통이 이뤄질 턱이 있겠는가.
박 대통령의 불통 사례는 일일이 손으로 꼽기조차 벅차다. 각 부처의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들과 대면 보고를 기피하는 일은 모르는 국민이 없다. 한 청와대 비서실장은 재임 기간 1년여 동안 대통령과 독대 한 번 못했다고 한다.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이런 지경이니 국민과의 소통은 언감생심이다.
헌재의 대통령 탄핵과 특검 수사는 법에 따라 판단하면 된다. 그런 과업 못지않게 권력이 오작동되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대통령과 공조직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차기 정부에서 청와대의 내부 시스템을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긴 하지만 그런 제도가 정착된다면 민주주의가 한 단계 격상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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