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각자가 상호 동등한 관계에 있게 되는 원초적 입장에서 합의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을 구상하고, 그 핵심을 ‘공정으로서의 정의’라 했다. 공정한 최초의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합의된 것이 정의다. 순수한 가상적 상황으로 가정된 원초적 입장에서 개인들은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반적인 것을 함께 선택할 수 있다. 공정한 절차에 의해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추구되면 자발적인 체제에 근접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적 협동체를 이상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다음과 같은 상이한 두 원칙을 고려해야 한다고 롤스는 주장한다.
“첫 번째, 각자는 다른 사람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두 번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즉 모든 사람들의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돼야 한다.”(‘정의론’)
첫 번째 원칙은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할당함에 있어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 두 번째는 재산이나 권력 같은 경제적 정치적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것이 모든 사람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나 변두리 소수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수 있을 정도의 이득이 주어지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위와 직책 등 삶의 기회가 온당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가까이 갈 수 있다.
흔히 공리주의 원칙으로 알려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골몰하면서 롤스는 최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최대 다수에서 배제된 소수자들, 이를테면 노예 상태에서 불평등을 감당하며 행복에서 소외된 사람들, 희망이 봉인된 사람들까지 공정한 정의의 기반 위에서 살 수 있기를 희구했다.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사회주의 관점을 절충한 롤스의 정의론은 양쪽 모두에서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제3의 길은 언제나 험난한 법 아닌가. 최인훈의 ‘광장’에서 남한과 북한 체제 모두에서 실망한 이명준이 제3국으로 가는 배에서 투신자살해야 했던 사정 역시 제3의 길의 곤혹에 있지 않았던가.
굳이 ‘흙수저’나 ‘헬조선’ 담론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사회 도처에서 삶의 기회가 평등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모든 사람에게 삶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공정한 사회를 향한 합리적이면서도 준엄한 실천이 절실하다. 그래야 정녕 희망을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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