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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정치만큼 캠핑에 열정…소떼 방북 정주영처럼 캐러반 몰고 北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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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03 22:14:58 수정 : 2017-03-03 22: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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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의원 지낸 장경우 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 / 혈기왕성 학창시절 / 노조위원장→CEO→정치인 / 의원 시절 캠핑을 만나다 / 17년 총재직 못 다한 숙원
공부를 곧잘 했지만 운동을 더 좋아했다. 수재들이 모이는 경기중·고를 다니면서도 ‘죽어라’ 공부만 하지 않았다. 운동을 더 많이 했고, ‘써클’을 만들었다. 폭력사건에 휘말려 퇴학 위기를 맞기도 했다. 고려대 재학 시절엔 축구부에서 살다시피 했다. 매니저처럼 선수들을 챙기고 선수 스카우트에도 관여했다.

첫 직장은 씨티은행. 앞장서 노조를 만들었고 스물여덟에 노조위원장이 됐다. 파업 중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지금 유신이야, 유신! 죽으려고 환장했어?” 악몽의 48시간이었다. 5년 뒤 ‘정박’보다 ‘항해’를 선택했다. 서른셋에 사표를 던지고 넓은 바다로 나갔다. 암초에 부딪히고 파도에 휩쓸리며 기업인으로, 정치인으로, 증권사 사장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극적이게 다이내믹한 삶이요, 변화무쌍한 이력이다. 스스로 “그 간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지곤 했다”고 회고했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노정객 장경우(75)의 인생 궤적이다. 


국회의원 시절 김대중 대통령과 포즈를 취한 장 총재.
그는 아직 현역이다. 한국 ‘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가 현재 그의 직함이다. 17년째 한국적 캠핑 여가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정계를 떠난 지 오래지만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치인생의 출발은 군부독재정권 5공화국의 여당, 민정당이지만 옳다고 생각하면 여야 경계를 뛰어넘는다.

2월 하순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마주한 그는 7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정 넘치는 모습이었다. 네 시간을 쉼 없이 말했다. 10시 반 시작된 대담은 오후 2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캠핑캐러바닝이 뭔가.

“17년째 총재를 맡고 있다. 2002년 세계대회를 처음 유치해 동해 망상에서 치렀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캠핑은 알지만 캐러반은 잘 몰랐다. 캐러반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집시들의 포장마차, 또 하나는 중동 대상의 낙타 캐러반이다. 캐러바닝은 집시들의 포장마차에서 연유한다. 포장마차에서 먹고 자면서 이동하는 거다. 영국의 전통 캐러반 클럽이 있는데 배지가 포장마차다. 이젠 말이 아니라 자동차가 캐러반을 끄는 거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탄신 기념행사’에서 트럼본을 불며 행진하는 장 총재. 그는 인천 신흥국민(초등)학교 밴드부였다.
-대회라는 게 어떤 건지.

“가족 중심으로 자연 속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교류하는 여가문화 축제다. 낮시간엔 자유롭게 주변관광을 하거나 낚시, 골프, 등산 등을 즐기고 저녁엔 각국 고유의상 퍼레이드, 노래자랑, 댄스파티, 요리대회 등 주최국이 마련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대한민국에 여가문화라는 게 특별히 없지 않나. 안방에서 화투를 치거나 윷놀이하는 정도였지. 캠핑, 캐러바닝은 한국적 여가문화로 발전시킬 상당히 좋은 문화다.”

그가 캠핑문화와 연을 맺은 것은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열리던 때다. 미국에서 유학한 세 젊은이가 엑스포 현장 주변에 캠핑촌을 만들었다. 그런데 3개월간의 엑스포가 끝나자 캠핑촌도 철거하게 된 것이다. 세계연맹에서는 “한국 측이 가입해놓고 소식이 단절됐다”며 한국 정부에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외교부는 “국제적 망신일 수 있다”며 건교부를 통해 해결을 요청했고, 이 문제를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소속이던 장 의원이 맡게 된 것이다. 그는 그해 일본 오토캠핑연맹이 주최하는 하마다시 세계대회에 참석하곤 깜짝 놀랐다. 개회식엔 일왕이 직접 참석했다. 장 총재는 “이게 간단한 게 아니로구나, 우리도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장경우는 아직 ‘현역’이다.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로, 70대 중반 나이에 청년 같은 꿈을 품고 산다.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분단선을 넘었다면 난 캠핑카를 몰고 남북을 횡단하고 싶다.” 장 총재는 “과거 정치했던 거 이상으로 정력과 애정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남제현 기자
-정치를 하면서 또 다른 직업을 가진 셈인가.

“그런 셈이지. 김대중정부에서 여가문화의 이정표를 세운 공로로 상도 받았다. 캠핑연맹은 대통령 표창을, 나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정치하면서는 아무런 표창도 못 받았는데. 그래도 캠핑 관계 일을 본격적으로 한건 정계를 떠난 이후다. 2008년엔 가평 자라섬에서 세계대회를 치렀다.”

-정치 입문은 어떻게.

“우연한 계기였다. 씨티은행 취직 1년 만에 노조위원장이 됐다. 장교 출신이어서 직장예비군 대장을 맡다보니 업무 외적으로 자연스레 리더십이 생겼다. 그러다 미국 본점 연수를 다녀오고 그 엄청난 규모에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서 출세하려면 까마득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결국 내 발전을 위해서는 나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6년 만에 씨티은행을 떠났다.”

그가 말은 안 했지만 고려대 상대 동기인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출세도 영향을 줬는지 모른다. 그가 소개한 에피소드가 단서다. “입사 5년째 창립기념일에 미국 씨티은행 회장이 방문해 조선호텔에서 큰 파티가 열렸다. 장관, 대기업 총수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MB가 눈에 띄었다. ‘야, 웬일이냐’며 반갑게 악수하고 명함을 받으니 ‘현대건설 사장’이더라. ‘너 언제 이렇게 출세했냐.’ 정주영 회장 비서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깜짝 놀라 물었다. 학창시절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 선거에서 두 사람은 경쟁 관계였다.

바로 정계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사업을 하면서 실패를 겪고 세상을 배웠다. 처음엔 퇴직금과 재산 수천만원을 털어 동전 넣고 하는 전자오락게임기 사업을 했다. 여섯대를 만들어 미도파백화점과 서린호텔에 설치했다. 처음엔 돈이 좀 되더니 한두달 지나니 서린호텔 쪽은 수입이 거의 없었다. 경기고 후배인 서린호텔 사장은 “형님, 제발 치워달라”고 호소했다. 건달들이 술 먹고 몰려와 꼬챙이로 동전투입구 안쪽을 건드리며 밤새 공짜로 게임을 즐겼던 것이다. 1년 반 만에 사업을 접고 입사한 데가 대우계열사로 흡수된 수산물 수출회사, ‘한남’이었다. 실패는 이어졌다. 동해안 오징어를 거의 독점수매해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맡아 진행했는데 “조금 더 기다리면 값이 더 뛸 것”이라는 사장의 말에 시기를 놓쳐 사고가 났다. 너무 오래 보관하는 바람에 변질된 상태로 수출했던 것이다. 일본 수입업체는 16만달러 환불을 요구했다. 그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냉동오징어와 씨름하며 4년을 보내고 다시 신한주철 전무로 옮겨 2년을 더 보낸 뒤였다. 


-왜 민정당이었나.

“이재형 민정당 창당준비위원장 겸 대표가 동향(경기 시흥)이었다. 작은 아버님과 초등학교 동창이었지. 시작은 이 대표의 보좌역이었다. 그분은 제헌국회의원 출신으로, 엄격한 원칙주의자였어. 이재형 선생만큼 ‘국회의원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정치인 스스로 국민의 대표로서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이재형 선생의 철칙이었지. 그러나 당시 민정당 내 사정은 그렇지가 못했어. ‘국회의원은 당이 뽑아 준 사람’, 즉 ‘국민이 뽑아줘서 된 것이라기보다는 당이 지목하고 공천해 줬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지.”

당시 권정달 사무총장을 위시한 당 실세들의 권세는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모든 당직자는 물론이고 국회의원들까지도 이들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퇴근시간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서는 90도 인사를 했다. 장 총재는 “모 의원은 현관까지 달려나가 바라보지도 않는 그들의 뒤꽁무니에다 대고 90도 인사를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고 회고했다. 이 대표는 그런 실세들과 충돌하고 갈등했다.

-원래 꿈이 정치였나.

“대통령 해보고 싶다는 꿈은 있었지만 철 나면서 그 꿈은 사라졌다. 대학시절 학군단하면서 장교로 임관해 최전방 근무하다보니 국가관은 투철해졌다. 또 사회에 진출해 노조위원장까지 하다보니 정치 쪽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됐다.”

-군대 안 간 정치인, 공직자가 많지 않나.

“아들 셋 모두 군대 갔다 왔다. 군대는 당연히 갔다 오는 것이다. 국토가 분단돼 있고 항전태세인데 어떻게 군대를 안 가나. 의무를 저버린다는 건 국민의 도리는 물론 지도자로서 덕목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역할과 생활을 제대로 못했다. 박 대통령이 심했다. 국민에게 엄청난 실망을 준 거 아니냐. 그러나 헌정중단 사태로 국격이 더 추락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물러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오긴 했지만.”

-학창시절은 어땠나.

“스포츠를 즐겼다. 기계체조는 중고교 대표선수로 나갈 정도로 열심히 했다. 경기고 시절 ‘아이스크림’이라는 연합서클을 만들었는데 도봉산 폭력사건으로 모두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해선 축구를 통해 고대생이 되어갔다. 축구부 응원을 다니면서 축구부원들과 친해졌고 아예 축구부에 살다시피 했다. 자연스레 축구부 매니저처럼 되어버렸다. 사소하게는 시험 때 축구부 선수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일부터 크게는 우수한 고교 선수를 스카우트해오는 일까지 관여했다. 3학년 때 스카우트 쟁탈전은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그렇게 스카우트에 성공한 선수가 김정남 감독과 정강지 선수다.”

-정치와 캠핑, 어떤 일이 더 끌리나.

“1993년 우연히 연을 맺어 지금까지 총재를 하고 있다. 게다가 아시아 퍼시픽 회장도 맡고 있단 말이지. 과거 정치했던 거 이상으로 정력과 애정을 쏟고 있다. ”

-캠핑연맹 총재로서의 꿈이 있다면.

“세계 캠핑·캐러반 대회를 남북한서 동시에 여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갔다면 우린 캠핑카를 몰고 남북도로를 횡단하는 거지. 노무현정부 시절 평양을 오가며 시도는 했다. 북에서 대가로 50만달러 요구해서 연맹 차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남북 간 새로운 민간교류로 꼭 성사시킬 거다.”

류순열 선임기자 ryoosy@segye.com

◆ 장경우 프로필


△1942년 경기 시흥 출생 △경기고,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씨티은행 노조위원장 △민정당 대표 보좌역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11·13·14대 국회의원 △동서증권 사장 △민정당 원내부총무 △민주당 최고위원 △한나라당 홍보위원장 △세계캠핑캐바라닝기구 아·태지역위원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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