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20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게 경선에서 패한 후 행한 승복 연설이다. 우리 정치사에 남을 명연설로, 불복이 판치던 정치권에선 흔치 않는 승복 선언이었다. 이날 그의 깨끗한 승복은 향후 정치가도에 소중한 밑거름이 됐고,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했다.
박태해 논설위원 |
탄핵을 초래한 국정농단 본질은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이라는 비선실세에 휘둘려 국정을 어지럽힌 일이다. 특히 헌재가 ‘세월호사건에 대해 정치적인 책임은 물을 수 있어도 법률적인 책임은 없다’고 했지만 당시 그렇게밖에 대처하지 못했냐는 의문은 여전하다. 정윤회 문건 파문도 마찬가지다. 비선실세 국정개입 사실을 제쳐놓고 문건 유출로만 몰아세워 화근을 키웠다. 언론과의 관계는 또 어땠나. 국정농단이 불거진 이후 10월 25일, 11월 4일, 11월 29일 세 차례 대국민 담화와 신년간담회를 했지만 의혹 해소는커녕 일방적인 입장만 전달했다. 출입기자들은 바보가 됐다. 우리가 탄핵 소용돌이 속에 있던 1월18일 미국 버락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며 기자들에게 “기자는 아첨꾼 아니다, 어려운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유로운 언론’에 있다”고도 했다. 이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탄핵심판 과정에서도 불통은 가시지 않았다. 헌재 선고 직전까지 기각이나 각하 결정을 굳게 믿었다고 한다. 청와대 참모와 주변에서 재판관 성향을 조사해봤더니 기각 또는 각하가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태극기집회 인원이 촛불집회를 넘어서 유리한 국면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인용과 기각 상황에 대비해 ‘플랜A’(기각 또는 각하), ‘플랜 B’(인용)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헌재 판결 후 첫 마디로 “드릴 말씀이 없다”고 한 것이나 사저 이주가 늦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여론은 8대 2 또는 7.5 대 2.5 정도로 인용이 압도적이었다. 헌재 주변 정황도, ‘생각 있는’ 정치인과 언론도 정반대 기류였는데도.
자연인으로 돌아간 박 전 대통령은 삼성동에서 ‘사저정치’를 준비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와도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높다. 진돗개, 올림머리… 심지어 정신건강까지 다시 입방아에 오른다. 청와대 시절 성형수술, 굿판, 밀회 등 끝없는 루머의 연장이다. 사실상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는데도 여전히 호기심 대상이다. 이젠 그만 분노와 관심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나. ‘3·10 헌재 선고’ 후 그와 친박은 누가 뭐라 해도 ‘흘러간 물’이다.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지 않은가.
이제 우리의 시선은 미래로 향해야 한다. 대선이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 대선 체제로 돌입했다. 진영에 따라 서로 “박근혜정부 2기가 돼서는 안 된다”, “노무현정부 재현을 막아야 한다”고 소리친다. 유권자들이 ‘매의 눈’으로 후보를 검증해야 한다. 문재인 안희정 이재명 홍준표 유승민… 이들 후보들을 많이 안다고 하지만 실제 잘 모른다. 박 전 대통령이 그 사례가 아닌가. 5월엔 희망을 다시 봐야하지 않겠나.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영국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 이 말이 새삼 묵직하게 들린다.
박태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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