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치러진 19차례 대통령 선거(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로 인해 이승만이 하야, 같은해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또 다시 4대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에 18대 대통령까지 대통령 선거는 19차례 열렸다) 중 직선제는 2·3·4(3·15부정선거)· 5· 6·7·13·14·15·16·17·18대 등 12차례이다.
이중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맞섰던 13대를 제외하고 모두 여야후보간 양자 대결 양상으로 전개돼 숱한 화제를 낳았다.

◇ '못 살겠다 갈아보자' VS '구관이 명관이다'…3대 대선
역대 대통령 선거용 구호 중 가장 유명하고 마음에 와 닿았던 구호는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1956년 5월 15일)때 야당인 민주당이 들고 나왔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여당인 자유당은 이승만-이기붕을 정부대통령 후보로 내 세웠다.
이승만과 자유당 8년 독재를 끝내기 위해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신익희, 부통령 후보 장면을 선출했다. 진보당은 조봉암과 박기출을 후보로 내세웠지.
민주당이 내건 선거 구호가 바로 '못살겠다 갈아보자'이다.
철없는 어린아이들까지 유행어처럼 외치고 다니는 바람에 자유당은 큰 위기를 느끼고 '구관이 명관이다' '갈아봤자 별수 없다' '갈아봤자 더 못 산다'라는 구호로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신익희 후보가 선거를 열흘 앞둔 5월 5일 전라도 유세에 나섰떤 열차 안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대통령 후보를 잃어버린 야당은 초 비상이 걸렸고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신익희 후보 몫까지 다 해 내겠다"고 이승만에 맞섰으나 504만여표:216만여표로 패했다.
900만표 중 185만 표가 무효표로 대부분 신익희 추모표로 분석됐다.

◇ '100만 운집 장충단 유세' 대규모 유세의 출발점…제 7대 대선, 예비군 '강화'-'해체'격돌
제 7대 대통령 선거(1971년 4월 27일)하면 장충단 유세가 가장 먼저 떠 오른다.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에 맞서 야당인 민주당은 '40대 기수론'경쟁끝에 김대중 후보가 등장했다.
박정희와 김대중은 정책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했지만 박정희는 "250만 예비군 주축으로 안보 강화"라며 6·25 전쟁참화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건들였다.
반면 김대중 후보는 '예비군과 교련교육'이 독재의 상징이라며 예비군 해체와 교련교육 철폐를 들고 나왔다.
7대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의 4월 18일 장충단 유세가 특히 유명하다.
야당은 100만 관중이 모였다고 했지만 '30만 관중'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일부 외신은 "70~90만이 모였다"고 전했다.
1971년 당시 서울시 인구가 500만으로 서울시민 10명 중 한명이 장충단에 모인 셈이다.
장충단 유세를 정점으로 김대중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지만 지역 대결 양상이라는 나쁜 선례와 '여도야촌'구도에 따라 박정희(634만여표)가 김대중(539만여표)을 물리쳤다.
박정희는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살았던 경상도에서 김대중 후보보다 3배 더 득표했다.
김대중 후보는 서울에서 57.9%를 얻었지만 농촌과 경상도, 북한의 위협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를 넘어서지 못했다.

◇ '우리가 남이가', 초원복국 사건으로 막판 세몰이 김영삼…14대 대선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997만 7332표(득표율 42%)를 얻어 숙명의 라이벌인 민주당 김대중 후보(804만12844표·득표율 33.8%)를 물리치고 대권을 차지했다.
14대 대선의 하이라이트는 초원복국 사건이다.
대선을 일주일 앞둔 1992년 12월 11일 당시 김기춘 법무부 장관과 부산시장, 검사장, 경찰청장, 교육감 등 부산 지역 기관장 6명이 복어요리 전문점인 '초원복국'에 모여 김영삼 후보 지원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은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고 하면 영도다리에 빠져죽자",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라는 등 지역감정을 부추겨 표를 얻을 것을 궁리했다.
이러한 대화내용이 녹음돼 정주영 후보의 통일국민당측에 전달됐다.
도청 테이프가 공개되자 '관권선거'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김영삼 후보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역으로 그 동안 느슨한 결속력을 보이던 부산과 경남 그리고 대구와 경북 등 영남권이 위기감을 느끼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행어와 함께 뭉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한국갤럽이 조사한 초원복국 사건 뒤 김영삼 후보의 지지율을 보면 부산·경남 출신의 경우 54.6%에서 56.3%로, 대구·경북 출신은 35.7%에서 41.3%로 김영삼 지지율이 크게 뛰었다.
영남지역 몰표로 김영삼이 당선됐으며 '우리가 남이가'가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다.

◇ 병풍(兵風)단어 첫선, '바꿔 바꿔 다 바꿔' DJ 로고송 …15대 대선
제15대 대통령 선거(1997년 12월 18일)에선 첫 선을 보인 병풍(兵風)이라는 단어가 핵폭탄급 위력을 발휘했다.
더불어 인기가요가 선거 로고송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 순간이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는 '곧은 이미지', '정치권과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점 등에서 줄곧 앞서 나갔다.
이회창 대세론이 선거 막판까지 꺼지지 않아 대통령 자리를 절반쯤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김대업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이회창 후보의 두아들 모두 '병역 면제'의혹이 있다고 폭로했다.
별다른 약점이 없어 보였던 이회창 후보이기에 이러한 스캔들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병풍'단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병풍 스캔들이 퍼져나가면서 이회창 후보 지지율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여기에 범보수 성향의 이인제 후보와 지지층이 상당수 겹치는 바람에 39만여표 차이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다.
개표결과 김대중 후보 1032만 6275표(득표율 40.3%)로 1위, 이회창 후보 993만 5718표(득표율 38.7%)로 2위, 이인제 후보 492만 5591표(득표율 19.2%)로 3위를 차지했다.
김대중 후보는 병풍과 이인제라는 지원군도 있었지만, 당시 인기를 구가하던 DJ DOC의 'DOC와 춤을'을 개사한 'DJ와 춤을' 선거 로고송을 택한 것이 승리에 이르는 신의 한수였다.
'바꿔 바꿔 바꿔 모든걸 다 바꿔'라는 되풀이 되는 노랫말이 던진 묘한 중독성은 "나를 찍어 달라"고 말하는 것보다 몇십배 큰 효과가 있었다.

◇ '병풍 2탄'-야당 후보 단일화-정몽준 '지지철회'…16대 대선
제16대 대선(2002년 12월 19일)을 통해 재수의 길을 택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역시나 끈질긴 김대업의 '병풍'공세에 밀려 꿈을 이루는데 실패했다.
선거 결과 변방의 무명장수에 불과했던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유효투표총수의 48.9%인 1201만 4277표로 1위, 이회창은 1144만 3297표(46.6%)로 2위, 권영길 후보가 95만 7148표(3.9%)로 3위를 차지했다.
민주당 경선조차 통과하기 힘들 것으로 보였던 노무현 후보가 57만여표 차이로 승리한 것은 '모범을 보여야할 지도층이 자식을 군에 보내지 않았다'라는 병풍에 반감을 가진 서민들 지지와 함께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의 막판 지지 철회에 따른 반사효과 때문이다.
정몽준은 2002월드컵 4강 신화 후광에 힘입어 일약 정치권 중심인물로 등장했다.
부친 정주영 회장이 못다 이룬 꿈을 마무리하겠다며 2002년 9월 17일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가장 위기를 느낀 이는 지지층이 상당수 겹치는 노무현 후보였다.
당초 후보 단일화는 정몽준 후보로 단일화 될 것으로 판단한 민주당 내 반(反)노무현, 비(非)노무현 측의 요구에서 시작됐다.
노무현 후보는 여론 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라는 자신에게 불리한 안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협상에 나섰다.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노무현 46.8%: 정몽준 42.2%)했다.
이때 나온 장면이 노무현-정몽준 두사람이 의기투합을 상징하는 러브샷이다.
하지만 정몽준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하는 엄청난 선언을 했다.
정몽준측은 노 후보측의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문제삼아 "같이 갈 수 없다"고 판을 깼다.
다급해진 노무현 후보는 자정무렵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 자택을 찾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 일로 위기감을 느낀 진보 진영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고 노무현에게 표를 몰아줘 결과적으로 승리하게 만들었다.

◇ 예선이 본선보다 어렵다…17대 대선
제17대 대통령 선거(2007년 12월 19일)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1149만 2389표(득표율 48.7%)로 1위, 민주당 정동영 617만 4681표(득표율 26.1%)로 2위, 무소속 이회창 355만 9963표(득표율 15.1%)로 3위를 기록했다.
17대 대선을 통해 '예선이 본선보다 어렵다'라는 새로운 말이 탄생했다.
당시 보수층에선 "이번엔 보수 후보를"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반면 여당인 민주당의 후보군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따라서 청계천 재개발로 유명세를 탄 이명박 서울시장과 '박정희 향수'라는 전가의 보도를 품고 있는 박근혜 의원과의 한나라당 경선(2007년 8월 20일)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명박 후보는 사투끝에 박근혜 후보를 누르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이후 이회창 전 총리가 한나라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나서는 바람에 일부 지지층이 이탈했지만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 보수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구호로, 박정희 향수팔이…18대 대선
제18대 대통령 선거(2012년 12월 19일)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1577만 3128표(득표율 51.55%)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처음으로 득표율 50%를 넘어섰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1469만 2632표(득표율 48.02%)로 108만 496표 차이로 2위에 머물렀다.
박근혜 후보는 진보후보의 단골메뉴였던 '경제민주화'를 첫번째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당시 캠프 멘토였던 김종인 등의 도움을 받아 보수후보가 먼저 진보적 공약을 제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경제성장 정체기에 접어든데다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는 시점에서 고도성장기를 이끌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장년, 노년층의 묘한 향수를 몰래 자극한 전략이 주효했ㄷ.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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