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상으로는 봄처럼 느껴지지만 봄을 상징하는 꽃도 풀도 없어 추운 겨울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었던 흉노 땅처럼 2017년 한반도 정세도 3월이라는 시기에 맞지 않게 꽁꽁 얼어붙은 동토(凍土)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남북관계의 마지막 연결선이었던 개성공단마저 폐쇄되고 남북을 잇던 통신선이 모두 단절되면서 남북관계는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직후처럼 모든 대화가 단절된 채 군사적 대치만 지속하던 시기로 되돌아갔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우리측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 실내를 북한군이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
◆ 남북관계는 서로의 착각 속에서 이뤄진다
1953년 이후 남북 관계에서 가장 큰 특징은 남북한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세가 펼쳐진다고 착각했을 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를 순찰하는 장병들. 육군 제공 |
2000년대 남한의 김대중 정권이 내세웠던 햇볕정책도 마찬가지다. 당시 국제사회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한은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화해와 교류 협력을 실시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국가보위성 등 공안 통치 체계를 믿고 햇볕정책을 역이용해 경제적 지원을 얻고자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4월 발표한 드레스덴 선언도 남북 체제 대결에서 남한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조기 대선까지 60일도 채 남지 않은 현재 상황은 북한과 남한 내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집권 가능성이 큰 야권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을 추종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간의 정책에 피로를 느끼는 국민들은 정책 전환을 반길 가능성이 높다. 5월 대선이 끝나면 남북 대화가 빠르게 재개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 “착각은 자유”…심상치 않은 美 대북 압박
지난달 14일 주한미군 캠프 스탠리 기지에서 대량살상무기 제거 훈련을 실시하는 한미 장병들. 미 2사단 제공 |
가장 큰 요인은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미국이다. 주한미군은 지난달 14~17일 한국군과 태스크포스 아이언 레인저스(Task Force Iron Rangers)라는 연합부대를 편성해 경기도 포천 영평사격장(로드리게스 훈련장)에서 북한 대량살상무기(WMD) 시설을 탐지하고 파괴하는 훈련을 했다. 주한 미 육군 66기갑연대 3대대는 지난 8일 경기도 의정부 캠프 스탠리 기지에서 적 갱도 소탕훈련을 실시했다. 이들은 북한 지하갱도를 본뜬 갱도에 진입해 적을 소탕하는 기술을 숙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개된 사진에는 미군 장병들이 갱도의 어둠 속에서 신속하게 움직이는 모습과 개인화기를 사격하는 모습 등이 담겼다. 지난 7일에는 사드 발사대 2기의 국내 반입을 발표했으며, 12일에는 군산 공군기지에 그레이 이글 무인공격기를 배치했다고 밝혔다. 미 해군의 최첨단 구축함인 줌월트와 미 해병대 장비의 순환배치, 사드 포대 추가 배치 가능성도 계속 거론된다.
동중국해서 합동훈련을 펼치고 있는 미 해군 이지스함 베리함과 일본 구축함 아시가라. 미 해군 제공 |
F-35B 스텔스 전투기. 올해 초 주일 미군에 배치됐다. 록히드마틴 제공 |
전임자인 조지 부시나 버락 오바마와는 다른 트럼프 대통령의 기질도 대북 강경정책을 부채질한다. 워싱턴 사정에 밝은 정부 소식통은 “변호사 출신으로 의사결정과정에서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오바마와 달리 트럼프는 단순하게 사고한다”며 “미국 국방부가 이치에 맞는 대북 군사행동계획을 가져오면 그대로 따를 사람이다. 대북 선제공격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효과를 낼 군사행동방안이 실행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렉스 틸러슨 미 국무부 장관을 접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이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강경하다고 해도 우리 정부가 ‘한반도 정세는 우리가 주도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움직인다면 북한과의 대화 혹은 압박 국면에서도 우리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차기 정부가 인수위 없이 바로 출범하는 것을 감안하면 정치권은 대선 기간 동안 대북 정책을 어떻게 취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을 사전에 구상해야 한다. 북한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만큼 대북 정책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초당적인 접근도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서 성과를 얻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뜻한 봄은 추운 겨울을 이겨낸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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