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관의 기습 접촉 제안에 더불어민주당의 2강(强)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대선 주자 진영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응답했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이뤄진 이번 장미 대선은 철저한 검증을 하기에 짧은 시간과 정해진 답변으로 채워지는 후보 토론, 가짜뉴스 활개, 일부 후보의 대세론으로 국민의 관심 저하 등 여러 아쉬운 점이 노정됐다. 그러던 중 미국 외교관의 기습 접촉 제안에 보인 대선 주자 행보의 ‘이유 있는 차이’를 뜯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미국 외교관과의 접촉에 따른 대응 방식이 실기시험의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직접 만난 안희정…파격 행보VS 서툰 행보?
민주당 안희정 경선 후보는 신속했다. 20일 밤 윤 대표가 오자마자 21일 오전에 만남이 전격 성사됐다. 후보가 직접 만났고 자문역인 교수를 대동했다. 윤 대표 일정을 고려할 때 미국 국무부가 윤 대표의 방한시 만날 예정이라고 밝힌 ‘시민사회 인사들(members of civil society)’중 첫번째 인사는 안 후보가 됐다.
더불어민주당 안희정 경선 후보(왼쪽 두 번째)가 21일 오전 서울의 한 식당에서 방한 중인 조셉 윤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오른쪽 두 번째)와 한·미 관계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안 후보 측 외교·안보 분야 자문을 맡고 있는 김흥규 아주대 교수, 안 후보, 통역, 윤 특별대표, 마크 내퍼 주한 미국 대사대리. 안희정 경선후보 캠프 제공 |
안 후보 측은 비공개 만남을 가진 뒤 언론에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만 알렸다. “안 후보는 금일(21일) 오전, 서울 시내 모처에서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마크 내퍼 미국 대사 대리와 한 시간 가량의 면담을 가졌습니다. 양측은 면담을 통해 한·미관계와 북핵문제 등 다양한 사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대변인 명의의 두 문장만 남겼다. 내용은 비공개로 하기로 약속해 공개하지 않았다. 신뢰문제를 부각했다.
한편 ‘격(格)’ 논란도 벌어졌다. 국장급 또는 그 아래인 미국 관리를 대선 주자가 직접 만났다는 점에서 외교관례상 굴욕적이라는 시각이 나왔다. 대선 주자의 적극적 움직임이 젊고 신선한 인상을 줬지만 외교의 ‘ABC’가 지켜지지 않은 서툰 행보였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자문역인 교수를 대동한 것도 관행적으로 이뤄져 온 것이지만 민간인의 외교행위라는 점에서 일부 전·현직 외교관들은 고질적인 문제로 꼽는다. 신속한 만남도 일정이 빠듯한 대선주자 입장에서는 미국 측을 상당히 배려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안 후보 측은 후보의 소신에 따른 행보임을 강조했다. 안 후보 측 관계자는 회동이 있던 당일 “안 후보는 미국이 대북정책을 원점에서 리뷰하면서 새로 수립하기 직전인 지금이 외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미국 측을 직접 접촉해 적극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 의견을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후보의 지론이 반영된 행보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맥락의 반론도 있다. 한 정치전문가는 “도널드 트럼프의 신정부는 기존 외교문법을 파괴하고 있고, 예측이 불가능한 상대”라는 것이다. 기존 외교문법을 따르기보다 후보가 직접 미국 측 입장을 들어보고 이해하려는 것이 실용적 방법일 수 있다는 얘기다.
◆대리 만남 후 절제된 메시지 발신한 문재인
민주당 문재인 경선 후보는 시간을 끌었다. 20일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제안을 받았지만 한 템포 쉬어 대리 만남을 결정하고 22일 오전 자문역을 맡고 있는 서훈 이화여대 교수(전 국가정보원 2차장) 등이 윤 대표를 맞게 했다. 대리 만남을 하면서 문 후보 측은 처음으로 “외교에는 내용도 있지만 형식도 있다”고 점잖게 일갈했다. 미국 측이나 안 후보 측을 굳이 겨냥한 것이 아니더라도 뜨끔한 쪽이 있을 수 있다.
처음으로 내용이 담긴 메시지를 발신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격 논란을 감안하면 미국 관리가 ‘리스닝 양식’로 한국 대선의 동태를 살피러 오는 정도의 회동에 비공개 약속까지 들어주며 ‘족쇄’를 채우는 것이 과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문 후보 측은 만남 후 서 교수 명의로 “오늘 자리에서 현재 한·미동맹은 공고하고 다음 정부에서도 변함이 없음을 확인했다. 북한의 최근 도발적 행동에 대한 우려와 함께 북한 비핵화가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문제라는 부분 역시 공감했다. 이와 함께 북핵 대화의 문은 열려있고 다만 언제 시작하느냐는 북한의 태도와 한·미간 협의에 따라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도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입장을 전했다.
단 세 문장이었지만 대화에서 미국 측과 어느 부분을 공감했는지 밝히고, 대화 재개 가능성을 언급함으로써 향후 대화재개를 둘러싼 입장차이에 어떻게 대처할지 협상의 원칙도 제시했다. 국민의 관심과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아쉬울 수 있지만 내용이 담겨있으면서도 절제된 메시지를 줬다는 인상이다. 단 비공개 회동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다. 이 때문에 회동에서 공개가능한 메시지를 사전에 정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대선주자는 한·미 양국을 대표한 외교적 협의의 주체가 아닌데 마치 협의의 주체처럼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을 썼다”며 “1등 후보로서 대통령처럼 보여주는 캠프의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오른쪽) 23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호텔에서 조셉 윤 미국 국무부 특별대표(왼쪽)와 만나 한·미동맹 등 양국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 대표, 마크 내퍼 주한 미국 대사대리, 박 대표. 연합뉴스 |
◆‘격’ 논란 정리하고 사이다 브리핑으로 연륜 과시한 국민의당
안철수, 손학규, 박주선 경선 후보가 있는 국민의당은 후보가 아닌 당 차원의 만남을 가졌다. 박지원 대표는 2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는 이태규 의원, 김경진 수석대변인을 대동하고 만났다. 이, 김 의원은 선수(選數)로 치면 모두 초선이다. 교수 등 민간인도 없었다. 윤 대표가 ‘시민 사회 인사’들을 만나는 것은 윤 대표의 비공개 일정이었지만 국민의당은 모임 장소와 시간을 언론에 공개하고 사진을 서비스했다. 대화는 비공개로 하되 이후 기자간담회를 열고 질의응답까지 진행했다. 기자간담회를 정리하면 약 2800자 분량이었다. 격 논란은 완전히 정리됐고, 국민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데에도 상당한 노력을 한 인상을 줬다.
물론 기자간담회에서 박 대표는 “윤 대표의 말을 옮기는 것은 외교적 관례상 맞지 않다”고 설명하며 답변을 피해갔지만, 언론창구인 대변인과 국민을 대표해 외교현안을 상임위원을 동석시켰기 때문에 사실상 투명한 만남의 형식을 갖췄다. 후보가 정해지지 않은 시점에서 후보 개인이 아닌 당 차원의 만남 형식을 갖춘 점도 대선관리 차원에서는 잡음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다.
국민의당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 측이 안철수 후보 캠프 측에 따로 접촉제안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경선 후보들이 접촉 제안을 연이어 받고 있는 상황과 비교돼 안 후보 입장에서는 불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후보가 아닌 당 차원의 만남으로 여러 논란을 차단하고 상황도 반전됐다고 볼 수 있다. 박 대표의 상황정리를 두고 “과연 연륜의 정치인답다”는 말이 나온다.
◆유승민으로 겨우 체면치레한 보수진영
보수진영의 동태는 미국 관심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현 정부와 비슷하다는 판단 때문인지, 낮은 지지율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바른정당은 유 후보가 직접 윤 대표와 21일에 만났다. 약 1시간 동안 한·미관계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북핵문제 등 상호관심사를 비공개로 대화했다고 캠프 관계자가 전했다. 유 후보 역시 미국 측의 갑작스런 회동 제안에 즉각 직접 나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같은 날 회동한 민주당 안희정 후보와 비슷한 행보로 볼 수 있다. 격 논란보다는 보수진영의 현 처지가 더 부각됐다. 낮은 지지율로 고전하고 있는 당과 대선 주자들 처지 탓에 유 후보가 겨우 보수진영 체면치레를 한 셈이 됐다. 성조기가 내걸린 탄핵반대 집회에 나가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미국 트럼프 신행정부는 대북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 새 대북정책 수립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윤 대표가 의견수렴 차원으로 방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 17일 윤 대표가 20∼23일 한국을 방문해 “김홍균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만날 예정이며, 한국의 고위 관리와 시민 사회 구성원들과 만나 다양한 지역 및 양자 간 문제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3박 4일이라는 긴 일정을 채울 ‘시민 사회 인사’가 누구인지는 베일에 싸여있었지만, 언론 보도를 통해 대선 주자와의 접촉 일정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 대선 동향을 탐색하려는 미국 정부 측 인사와 대선 주자와의 만남은 과거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2002년 대선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당내 경선 중이었는데 미국 국무부 자문단의 제안으로 후보와 만나 한 시간가량 비공개로 면담한 적이 있다”면서 “당시 자문단은 민간인이지만 정부 대표성을 띄고 온 것이었다”고 말했다. 과거 면담은 모두 비공개로 이뤄져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셉 윤 일정이 노출되면서 미국 정부 인사의 탐색전은 이례적으로 사실상 공개 행보가 됐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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