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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진보 진영의 의제로 꼽혔던 복지가 이제는 이념을 초월한 국정 과제가 됐다. 복지의 기본 재원은 세수다. 복지 확대는 세원 확대와 세율 조정은 물론 복지 방향을 선별적으로 갈지 보편적으로 갈지,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설계해야 한다.
하지만 역대 대선처럼 이번 대선 주자들도 이런 고민과 국민을 설득하려는 자세는 별로 안 보이고 선심성 복지공약만 남발하는 양상이다.
대부분 후보들은 65세 이상 노인에게 주는 기초노령연금 지급액 인상 또는 대상 확대를 내걸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경선 후보는 현행 20만원에서 3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밝혔고, 국민의당 안철수 경선 후보는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주겠다고 했다. 민주당 안희정 경선 후보도 단계적으로 기초연금 급여율을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노인의 65.6%인 458만1000명에게 연간 약 11조3269억원의 기초연금이 지급됐다. 올해 기준연금액은 20만6050원이다. 만약 문 후보와 안 후보 공약대로 할 경우 연간 지급액은 각각 약 16조4916억원, 16조7688억원으로 5조원 이상이 더 든다.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가장 큰 인구집단인 40∼50대가 노령층으로 진입하면 연금 지급액은 2배가량 늘어나고 그만큼 젊은 층의 부양 부담이 커지게 된다.
현재 연령별 인구는 20대 약 675만명, 30대 753만명, 40대 879만명, 50대 842만명, 60대 537만명, 70대 323만명, 80대 이상 151만명이다. 현재 60대 이상보다 40∼50대가 2배가량 많다. 사망자 수를 감안하더라도 기초연금 대상자를 모든 노인으로 확대하면 지출액이 두 배가량 늘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20∼30대는 40∼50대보다 292만명이나 적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가 내건 아동수당 지급도 연간 7조590억원을 새로 투입해야 한다. 초·중·고교 학생(지난해 기준 약588만명)에게 월 10만원을 지급하려면 매달 5800억원의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청년과 노인, 농어민, 장애인 등 2800만명에게 연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연 30만원을 각각 지급하겠다고 한 공약에는 연 수십조원이 든다.
한자리 모인 각 당 여가위 간사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각 당 간사들이 28일 국회에서 열린 여가위 전체회의에서 여성과 아동 관련 헌법 개정 의견서를 채택한 뒤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부터 자유한국당 간사 윤종필, 더불어민주당 간사 정춘숙, 국민의당 간사 신용현 의원. 연합뉴스 |
전문가들은 이러한 공약이 지속가능한 방안 없이 도입될 경우 ‘복지 포퓰리즘’에 나라가 거덜 나고 대다수 국민이 고통에 시달리는 남유럽과 남미 일부 국가 등의 전철을 밟게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등은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국가채무가 급증해 2007년 이후 잇달아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다. 과다한 공공부문 일자리, 기초연금 등 복지 지출이 요인으로 꼽혔다. 이 때문에 ‘건강한 복지’ 모델로 꼽히는 북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스웨덴 등 복지 수준이 높은 북유럽 국가 국민들의 조세부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정부는 복지 수준을 늘리다가도 경제 상황, 기대수명 등에 따라 수위를 조절하는 등 끊임없이 ‘복지 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북유럽 수준의 복지를 꿈꾸면서 비용 부담은 어떻게든 적게 지려고 한다는 게 문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스웨덴의 조세부담률은 32.9%에 달했지만 한국은 OECD 평균(25.1%)에도 못 미치는 17.9%에 그쳤다. 세계 최고인 덴마크(47.5%)의 절반도 안된다.
우리나라보다 조세부담률이 낮은 나라는 OECD 회원국 중 멕시코(16.6%)와 슬로바키아(17.1%) 2개국뿐이다.
◆당장 제도 추가보다 중요한 건 복지 확대 여건 만들기
사정이 이런데도 대선 주자들부터 아동수당·기본소득제 도입 등 북유럽이 도입했거나 실험 중인 제도를 따라 하자고만 할 뿐 이러한 복지가 가능한 여건에 대해선 함구한다. 전문가들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이자 사기라고 입을 모은다.
인하대 윤홍식 교수(사회복지학)는 “지금 대선 후보들은 선거 승리를 위한 일회적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며 “조세 저항의 원인 중 하나인 불신을 완화하고 증세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않는 한 북유럽식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민의 조세 저항을 완화하려면 세금 혜택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며 “법인세 깎아주기 등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이명박정부의 감세 정책을 철회하고 모든 사람이 조금씩 세금을 더 내는 ‘누진적 보편 증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건사회연구원 윤석명 연구위원은 “선별적 복지를 할지 보편적 복지를 지향할지에 대한 합의도 필요하다”며 “기초연금의 경우 사회의 도움이 절실한 저소득층 노인에게 현 20만원 수준이 큰 도움이 안 될 수 있는데 지급 대상을 모든 노인에게로 확대하면 어떻게 소외계층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겠냐”고 말했다.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정치 지도자들이 선거 때 표만 노린 복지 확대를 외칠 게 아니라 수준 높은 복지를 구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 국민 대다수가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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