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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저자인 레나타 살레츨의 테드 강연. |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의 저서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일상에서 수시로 직면하고 또 강요당하는 ‘선택’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성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책의 원제는 ‘선택의 폭정(The Tyranny of Choice)’이다. 그는 우리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라고 못박는다. ‘모든 것이 내 선택에 달려 있다’는 이데올로기 탓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내가 뭔가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 하는 강박에 시달리고, 일이 잘못되면 ‘내가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더 불안해지고 탐욕스러워진다는 게 살레츨의 진단이다.

살레츨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선택 이데올로기의 근간인 합리적 선택이론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합리적 선택이론은 사람들이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늘 편익의 극대화와 비용의 최소화를 추구한다고 전제한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은 늘 지배적인 상황과 주어진 충분한 정보에 의존해 가장 이익이 되는 선택지를 고를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은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들어맞지 않는다. 실제로는 우리의 선택지가 극히 제한적인데, 선택 이데올로기가 이런 사실을 은폐한다고 살레츨은 말한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신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위의 다수가 믿는 것을 참이라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들은 ‘타자의 믿음에 대한 믿음’에서 번성한다.”

살레츨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팔로마 씨’에서 파리의 치즈 가게를 방문한 팔로마가 직면한 상황을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팔로마는 상반되는 욕구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한편으로는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알고 싶다는 것인데, 이 욕구는 모든 종류의 치즈를 맛봐야만 충족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완벽한 선택을 향한 욕구, 즉 자신과 천생연분의 치즈를 찾겠다는 욕구가 그것이다. 그런 치즈는 그가 그 치즈를 알아볼 수 없다 해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가장 빤한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광고가 많이 된 것을 고른다.”
팔로마가 치즈 가게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선택의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곤 한다. 결국은 남들이 하는대로 불쑥 무언가를 선택한다. 편익의 극대화나 비용의 최소화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자기계발이 유행하는 풍조도 선택 이데올로기 탓이다. 자기계발서는 선택을 잘하면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기계발서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조언하는 대로 하면 우리가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살레츨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불안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다 보면 타인에게 무관심해지고 결국 사회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고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는’ 일에 힘쓰는 동안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전망을 잃어버리고 만다. 또 자기계발에 몰두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과 능력도 상실하고, 왠지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에 늘 불안해한다.”
살레츨은 “선택이 개인적 삶을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궁극의 수단으로 찬양될 때, 사회적 비판의 여지는 거의 사라지고 만다”면서 “개인적 선택에 집착하는 동안 우리는 선택이 결코 개인적이지 않으며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 결과 “우리는 사회질서의 결함을 보는 대신 자신의 결함을 보고, 우리가 누리거나 성취하는 것이 적을 때 자신이 열심히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관만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선택의 독재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부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실제로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적어도 우리는 앞으로 어떤 사회에서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일상의 선택을 놓고 불안해하다가 정작 중요한 결정을 소홀히 넘겨선 안 된다. 살레츨이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메시지를 곰곰이 되새겨 보면 한달여 앞으로 다가온 5·9 대선의 의미도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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