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객주문학관에서 세 번의 겨울을 나며 장편 ‘뜻밖의 생’을 완성한 소설가 김주영. 그는 “기실 우리 모두의 생은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뜻밖인 건 없다”면서 “낮은 곳 추운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 위로를 받기 바란다”고 밝혔다. 남정탁 기자 |
“이 나이에 신간을 낸다는 게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과 같지 않나 싶습니다. 물레방아는 축이 튼튼해야 잘 돌아가는데, 이 물레방아는 축이 닳아서 삐걱거립니다. 그래도 이 나이가 되도록 써야하는 배경에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주제나 소재로 삼든 최종 목표는 그 작품을 읽는 사람이 위로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 추위에 떠는 사람,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사람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게 내 꿈입니다.”
노경에도 쉬지 않고 근면하게 글밭을 일구어 새 장편을 상재한 김주영은 지난 26일 기자들과 만나 자신이 문학을 붙들고 지금까지 달려온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이번에 펴낸 장편은 ‘호구’로 멸시당하며 세상을 살아온 노인이 동해 포구의 안개 낀 노상에서 화톳불을 앞에 두고 젊은 매춘부와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 여자 최윤서와 박호구, 생의 ‘난민’들이 나누는 대화는 긴 이야기의 해설을 맡는 막간극처럼 삽입된다. 이들이 말미에 함께 찾아 나서기로 한 ‘당나귀’의 실체는 ‘아낌없이 주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이 세상 어디엔가는 반드시 존재할 느꺼운 사랑이다. 그 당나귀는 정작 본질만큼은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덩치 큰 개’ 칠칠이로 상징된다.
불우하지만 욕망이 승한 ‘단심이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교활한 곡예단장, 색소폰 연주자, 시계수리공들이 호구와 칠칠이 주변의 막장 인생들이다. 신분증이 없어 강제징집을 당하지만 정작 군에서야말로 역설적으로 키 작은 그는 차별받지 않았고, 막판에는 ‘뱁새 둥지에서 뻐꾸기 새끼를 기른’ 호구가 이로 인해 감옥에 들어가 물경 16년을 살다 나오지만 그는 이제 해탈한 모양새다.
“난 지옥은 안 믿어도 운명을 믿는다고. 운명이 시키는 대로 살다 보면 바보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세월은 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가기 마련이야. 나같이 하찮은 인생이라고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인생이 뭔지 알아? 걸어다니는 그림자야. 해 떨어지면 사라지는 것이지.”
해가 떨어지면 사라지는 ‘걸어다니는 그림자’가 인생이라니, 길 위에서 내내 소설을 길어온 작가가 아니면 지어낼 수 없는 득의의 문장이다. 허망한 인생이지만 작중 인물 박호구는 “세상에는 좋은 것도 있고, 불편한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었으나 그 모두를 친구로 여긴다면, 좋은 것이든 미운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성가실 일도 없었고 두려울 것도 없었다”고 돌아본다. 그것은 세상 낮은 곳의 모든 존재들에게 작가 김주영이 대신 던지는 지극한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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