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포 완료 하루가 지났는데도 눈에 띈다. 집주인이 우편함에서 아직 꺼내지 않은 거다.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 단지 우편함 50여개를 살펴본 결과, 6개 가구의 집주인이 아직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
내달 9일 열리는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가구에 배포된 ‘대선 공보물’ 이야기다.
2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대선을 앞두고 배포한 공보물은 3억부가 넘는다. 국내 총 유권자 2200만여명에 총 후보 수 ‘14명’을 곱해 나온 값이다. 봉투 하나만 치면 2200만여통이지만, 후보 수로 따지니 이 같은 수치가 나온다.
제작부터 배포까지 수많은 땀방울이 들어가는 공보물이지만, 막상 배포 후에는 차가운 대접을 받기 일쑤다. 봉투조차 뜯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우편함에 꽂혔는데도 가져가지 않는 일이 많다. 선관위 홈페이지나 스마트폰 등으로 후보자 정보를 볼 수 있어서 생기는 일이라고는 해도 엄연한 자원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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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의 한 주택 현관. 가져가지 않은 공보물이 고지서, 전단 등과 그대로 방치됐다. |
이날 직접 둘러본 서울 종로구의 한 주택가에서는 공보물이 그대로 든 채 버려진 쓰레기봉투가 계속 발견됐다. 뜯어본 흔적은 있지만, 곧바로 쓰레기통에 던져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주택 현관 앞에서는 전단, 고지서 등과 함께 바닥에 남은 공보물이 보였다. 주인이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거였다. 파지를 모으는 고물상 앞에서도 공보물과 쓰레기가 함께 들어있는 봉투가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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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의 한 주택가. 누군가 쓰레기봉투에 귀퉁이만 뜯은 공보물 봉투를 끼워 넣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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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의 한 고물상 앞에서도 공보물과 쓰레기가 함께 들어있는 봉투가 발견됐다. |
보라고 만든 공보물이 찬밥 신세가 된 사이 외국에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재외국민 투표 대상자는 인터넷이나 모바일로만 후보자 정보를 볼 수 있을 뿐, 책자 형태의 공보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지리적 특성상 배송 문제가 얽혀 있어 어쩔 수 없다지만, 볼 수 있어도 보지 않는 일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은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영국 유학 중인 박재욱(31)씨는 후보 정보를 선관위 재외선거과가 보내온 이메일로 받았다. 재외투표가 204개 투표소에서 진행 중이니 기한 내에 꼭 표를 행사해달라는 내용도 포함됐다. 박씨는 “재외국민 투표자 중에도 책자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며 “아마도 중장년층분들께서 그러실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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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한 아파트 우편함. 가져가지 않은 공보물 봉투가 보인다. |
지난해 4·13총선 때는 공보물 ‘발송’에만 200억원이 넘게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봉투 제작비나 인건비 등을 합치면 총 액수는 2배 가까이 된다. 공보물 ‘제작’도 빈익빈 부익부여서 대형 정당은 수십억을 들여서라도 만들 수 있지만, 군소정당은 꿈도 못 꾸는 일인 탓에 실제로 비례대표 후보를 낸 21개 정당 중 9곳은 공보물 제작을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책자 공보물을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내 스마트폰 인구 4000만 시대를 맞았지만, 아직도 스마트폰에 익숙지 않은 인구나 인터넷 접근에서 소외된 이들을 생각하면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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