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해내는 것은 우리의 몫
혐오는 절대 불치병이 아니다
정치를 사랑하려면 투표해야 모든 제목은 그 자체로 지문(指紋)이다. 차별화된 특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그리스 영화의 제목 ‘나의 사랑, 그리스’ 또한 달달한 사랑이야기로 보아달라는 주문이 느껴진다. 화사한 영화 포스터에 녹아있듯이 20대, 40대, 60대인 세 쌍의 연인이 옴니버스 구성을 통해 힘든 현실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절대성을 일깨우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린 모두 각기 다른 얼굴이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만은 같은 얼굴이다”는 대사는 이 영화를 말랑말랑하게 본 관객에게는 안성맞춤인 한 줄 정리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분열된 세상(Worlds Apart)’에 집중해서 삐딱하게 보면 의외로 영화 속 사랑에서 중심 고리로 기능하는 안토니라는 어두운 인물에 주목하게 된다. 20대의 사랑에는 공격자로, 40대의 사랑에는 방관자로, 60대의 사랑에는 위선자로 군림하면서 갈등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나 가족, 남 탓을 하며 주변 모든 것에 대해 극심한 혐오를 표출한다. 영화에서는 그리스가 겪고 있는 심각한 경제 위기나 중동 난민의 유입으로 인한 정치 불안이 그런 혐오의 사회적 배경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
혐오라는 감정에 관심을 꾸준히 보여 온 여성학자 마사 너스바움의 책 ‘혐오와 수치심’과 ‘혐오에서 인류애로’ 등에 따르면 생물학적인 혐오는 오염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에서 유래한다. 배설물, 타액, 혈액 등 더러운 오염물로부터 순수한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그것들을 혐오하는 감정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간 심리적인 혐오는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을 오염물처럼 취급하면서 차별하거나 예속화하는 것과 연관된다.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공포’와 여기서 연유하는 ‘특정 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낙인찍기’가 바로 혐오이다.
이런 혐오를 비판하면서 절대적인 사랑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손쉽다. 그래서 사랑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랑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영화에서도 그리스 신화 속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을 논하면서 호기심이나 불신으로 인해 실패했던 그들의 첫 번째 사랑이 아니라, 죽음도 불사하는 속죄를 통해 재결합을 이루어냈던 두 번째 사랑을 강조한다. 두 번째 사랑 이후에야 비로소 에로스와 프시케도 ‘기쁨’이라는 자식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랑이 만병통치약이 아닌 것처럼 혐오가 불치병은 아니다. 그러니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혐오에 대한 혐오’가 필요하다. 두 번째 혐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혐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혐오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라면, 두 번째 혐오는 필수불가결한 혐오이다.
요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질적인 ‘정치 혐오’라는 유령이 다시 출몰할 조짐이 보인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 수 있다. 그래도 이런 혐오를 극복해야 할 몫 또한 어쩔 수 없이 우리 유권자의 몫일 터이다. 물론 혐오에 대한 혐오조차 혐오일 수 있기에 가장 바람직한 것은 혐오 자체를 원천 봉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언제나 새로운 것은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 기회부터 허락된다. 그러니 혐오의 부메랑을 피하면서 정치를 향한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일단 투표부터 하자.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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